[오이히나]안녕하세요, 표류자입니다. 3
“너희들이 ‘폼 나는 것’ ‘재미있어 보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크게 한숨을 내쉬며 아나바라는 눈앞의 문제아들을 바라보았다. 테루시마. 누마지리, 보바타, 이이자카, 히가시야마, 후타마타에, 오이카와에 히나타마저 아나바라의 앞에서 정좌를 하고 있었다. 현재 배구 부원들 중 살아남은 것은 리베로인 츠치유와 매니저인 미사키 뿐이었다.
2학년 6명 전부가 복귀하면서 배구 부는 부활할 수 있었다. 처음엔 간곡히 부탁해도 좋아, 라던가 고개를 끄떡여주지 않았던 그들이 갑자기 배구부에 돌아온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진 오이카와였지만, 히나타의 ‘뭐 어때요, 다시 배구를 할 수 있게 되었는걸! ’이라는 한마디에 ‘좋은 건 좋은 거지. 신경 쓰지 말자. 배구부도 부활했고’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선배들이 돌아온 후로 배구 부는 그야말로 순조로웠다. 아니, 솔직히 무서울 정도로 순조로웠다. 감독인 아나바라와도 사이는 괜찮았다. 예전의 배구부일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배구부가 부활하고 나서 첫 부 활동 시간 때 자신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이 하고 싶은 배구는 무엇이냐’라고. 그 질문에 대표로 테루시마가 말했다. 재미있고 즐거운 배구가 하고 싶다고. 그런 그들의 바램을 이루어주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그럴 예정이었던 것일까. 기초부터 새로 바꾸겠다고 지금까지의 연습내용도 싹 바꿔버렸다. 그 동안 학교가 고집해왔던 질실강건을 알게 뭐야, 라는 듯이 걷어차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지도하는 아나바라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2학년들도 진지하게 그의 지도에 따랐다.
2:2으로 이루어지는 짧은 시합. 2명에 익숙해져버려서 누군가가 해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세뇌같은 연습이었지만, 오이카와는 개인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안 된다고 생각한 오이카와는 감독에게 4:5도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2:2에 익숙해지면 시합에서 곤란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은 6:6을 원했지만 현재 9명인 배구부원들로써는 이게 한계다. 원래라면 4:4가 좋을 텐데, 9명이니 한명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한명을 리베로인 츠치유로 하는 것이 좋겠다며 아나바라와 상담했다.
그리고 예전에 조센지와 시합했던 히나타는 부원들을 설득해 함께 전체시합을 해보자며 오이카와가 이야기했던 메뉴의 추가를 발의했고, 모두가 찬성해서 그 메뉴는 오늘부터 정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4:5로 하는 경우에는 세터를 기준으로 해서 후타마타 팀과 오이카와의 팀으로 나누기로 했다. 개인 연습과 플라잉 연습을 하고, 남은 시간은 4:5를 하고 끝내자는 감독의 말에 오이카와는 만족하며 다른 부원들과 함께 플라잉에 몰두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아나바라가 화장실에 가겠다며 자리를 비우자 테루시마가 이걸 해보자, 라고 유0브에서 배구영상을 보여주었고, 그걸 따라하다가 아나바라에게 걸려 지금 이렇게 혼나고 있는 것이다. 츠치유는 무섭다면서 하지 않았고, 미사키는 매니저니까 참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좌라는 이름의 처벌에서 벗어나 있었다.
“기술을 따라하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멋있다는 이유로 기본을 소홀히 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어. 내가 뭐라고 했지?”
“2:2연습을 하기 전까지는 플라잉연습만 하라고…. 하셨죠.”
“플라잉은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꼭 해야 하는 훈련이라고, 내가 사전에 설명했지? 그걸 게을리 해서 어쩌자는 거야.”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아나바라의 말에 반박도 하지 못한 채 테루시마는 이리저리 눈동자만을 굴리고 있었다. 현재 이 배구부에 초보자는 없지만, 상급자 레벨에 있는 것은 오이카와 한명 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이카와 외에는 오합지졸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그것은 2학년들도, 히나타도 잘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다물고 있는 2학년들을 바라보던 아나바라는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재미없겠지만 한동안은 이 플랜으로 간다. 너희들은 기본기가 너무 부족해. 멋진 기술을 쓰고 싶어도 기본기가 잡혀있지 않으면 금방 무너지고, 다칠 확률이 높아진다. 적어도 이 정도면 다치지는 않겠지, 라고 판단했을 때 너희들이 갖고 온 기술을 익히는 것에 최대한 도움을 주마. 이 정도가 내가 너희들에게 양보해줄 수 있는 수준이다.”
“…….”
아나바라는 그다지 고압적이지 않은 감독이었다. 엄격하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무언가를 할 때 부원들의 의견을 묻는 일이 많았다. 그는 논리적이었고, 사람을 설득 하는 것이 몸에 배여 있는 남자였다.
“반성하나?”
“……네.”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잔뜩 풀 죽은 목소리로 테루시마가 고개를 끄떡였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알고 있다. 히나타도 알고 있다. 미사키도 알고 있다. 다른 부원들도 알고 있다. 저것은 연기라는 것을. 아나바라가 눈을 땐 순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서 아까전의 그것을 다시 해보자고 할 것이라는 것을. 그 증거로 설교가 끝나고선 바로 이이자카에게 어제 그것도 나중에 따라 해보자, 라고 말을 걸고 있었다.
“정신 못 차리지. 너”
이이자카의 말에 공감이라는 듯이 오이카와가 고개를 끄떡였다. 다행히 아나바라는 테루시마가 아직도 못된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는지 미사키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던 오이카와는 정좌를 한 탓에 저려오는 다리를 이끌고 4:5 연습시합을 하기 위해 지정된 코트로 향했다.
“어. 치비 짱. 이쪽 팀이었어?”
그리고 그곳에는 오이카와처럼 다리가 저리는 것인지 다리를 덜덜 떨고 있는 히나타가 서 있었다. 배구부에 들어오고 나서 많이 정좌를 해보았지만 여전히 정좌에 익숙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물며 이곳은 체육관. 딱딱한 마룻바닥 탓인지 다리가 더 빨리 저려오고 지속시간도 길다. 찌릿찌릿한 감각을 털어내듯이 다리를 흔들흔들 거리고 있으면, 히나타가 오이카와의 다리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아아-! 대왕님!!!”
“흐, 흥! 무슨 소리이려나!! 오이카와 씨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다리 저린 것은 치비 짱 뿐인 걸-!”
“히나 짱은 아무 말도 안했어. 안 그래? ‘대왕님?’’
“맞아. 너무 히나타를 의식하는 거 아냐? ‘대왕님?’”
“아, 그러니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요!”
네트 너머에서 기분 나쁘게 웃고 있는 테루시마와 이이자카에게 쏘아붙이듯이 오이카와가 항의해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선배들의 비웃음이었다. 선배들이 오이카와를 대왕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히나타가 그렇게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히나타에게 오이카와를 왜 대왕님이라 부르는 거냐, 라고 누마지리가 물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코트의 왕이라고 불리는 카게야마의 선배니까 대왕님이요.’라고 히나타가 솔직하게 대답하기 전에, 오이카와가 웃는 얼굴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 세계에도 카게야마는 있다. 키타이치에서 최고로 뽑히는 세터라고는 하지만 그는 오이카와와 히나타와 동갑이라고 되어있다. 즉, 오이카와가 그의 선배가 되는 것은 이상하다. 이 아이는 왜 바보같이 그걸 정직하게 말하려는 걸까나. 얼굴에 살짝 사거리마크를 띄우며 그를 내려다보면, 히나타도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제대로 된 변명거리를 만들어놓았다고 했다. 물론, 그 변명은 듣는 순간오이카와는 기각해버렸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때 있었던 일로 선배들은 오이카와를 히나타를 따라 대왕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히나타와 다른 점이 있다면, 히나타는 선배라는 말 대신 대왕님이라고 부르고 있었고, 다른 선배들은 오이카와를 놀리기 위해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머리가 아프다. 이 사단의 원인인 히나타를 노려보았지만 그에게 무어라 해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오히려 히나타의 변명대로였다면 선배들에게 이렇게까지 놀림 받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히나타의 입을 막은 자신을 저주하고 있으면, 어느새 4:5 연습시합이 시작 되었다.
‘여전히 이 사람들은 종잡을 수 없다니까.’
배구부가 아니라 다른 부와 경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계속 예상치 못한 곳에서 공격이 들어오고, 룰에 위반되지 않는 한에서 모든 수단을 끌어내 공을 띄우고 있었다. 리시브가 어떤 형태던지 어떻게든 띄우면 된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실제로 그렇게 처리하고 있었다. 이거라면 못 잡겠지, 라고 한 공격도 발로 막거나, 얼굴로 막거나 하는 걸 보면 임기응변이 뛰어나다는 말만으로 그들을 표현하기에는 어려웠다.
어떻게든 공을 띄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에 달려들고 있다. 그 모습에 오이카와는 마음이 뛰었다. 공격도 수비도 그럭저럭 이지만 승리에 관한 마음은 강하다. 그 모습이 오이카와를 점점 불타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치비 짱이랑 비슷한 플레이란 말이지…….’
움직임이 큰 탓일까, 자주 상대의 술수에 넘어가는 바람에 점수를 빼앗기고 있다. 리베로를 제외한 모두가 자신은 미끼라는 듯이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읽기 어려운 움직임으로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미끼로써는 우리 치비 짱이 최고지!’
오이카와가 씨익 웃는 것과 동시에 히나타의 공격이 들어갔다. 시라토리자와 전이 끝나고 무얼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히나타의 실력이 그때보다 늘었다. 어떤 일을 했기에 공의 흐름을 읽을 수 있게 되었는지 묻고는 싶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아마도 예전에 무심하게 물었던 그 한마디에 대해 반응했던 히나타의 모습이 트라우마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물을 때까지는 히나타의 실력이 늘었다는 사실만을 순수하게 기뻐할 생각이었다. 덕분에 카게야마와 하는 속공보다는 덜하지만 그것과 비슷한 속도와 느낌의 속공도 쓸 수 있게 되었고, 오이카와도 이것저것 새로운 걸 배울 수 있었다.
‘새로운 무기를 손에 얻었다는 것이 이런 느낌인가.’
물론 그 동안 오이카와가 속공을 써보지는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히나타와 하는 속공은 색달랐다. 좀 더, 좀 더 정밀하게, 좀 더 세세하게, 좀 더 빠르게. 그동안 이 공을 받아줄 사람이 없었기에 오이카와는 이것보다 더 빠른 속공을 연습하지 않았다. 하지만 히나타와 함께 싸우려면 자신이 하던 토스보다 더 정밀하고 더 빠른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이 드디어 틀이 잡혔다.
히나타가 달려가는 곳을 확인하고, 오이카와가 그쪽으로 공을 토스했다. 카게야마처럼 히나타의 손에 딱 명중하는 토스는 하지 못하더라고, 그가 있는 곳으로 공을 보내면 그는 반드시 쳐준다. 처음에 그렇게 약속했고, 히나타는 될 수 있는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공을 상대방의 코트에 꽂아 넣었다.
그래, 지금처럼.
“야-!!! 니들 속공 진짜 반칙이야!!! 저번보다 더 명중확률 올라간 거 아냐???”
“그만큼 더 연습한 결과겠지. 본받으라고. 선배.”
“그래. 그거 네 공이었어. 1학년들에게 지지 말라고. 선배.”
“확 감독님에게 이른다~선배.”
“아 진짜 너희들 너무 싫어!!”
자신을 몰아세우는 후타마타와 히가시야마와 이이자카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테루시마였지만, 두 사람은 꼴좋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너희들, 나랑 같은 팀! 그렇게 분개하는 테루시마에게 알겠다고 대강 대답을 하는 선배들을 보며 오이카와는 어째서인지 데자뷰를 느꼈다.
‘왠지 3학년 때의 나를 보는 듯한…….’
하나마키와 이와이즈미와 마츠카와가 아마도 저런 느낌으로 자신을 갈궈 댔었던 것 같다. 왠지 모를 그리움을 느끼며 네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면, 뒤에서 누마지리가 툭, 하고 오이카와의 등을 쳤다.
“확실히 늘었어. 오이카와. 처음에는 히나타의 얼굴에 공을 맞추건 했잖아. 그거에 비하면 많이 늘은 거지.”
“그, 그건 잊어주세…….”
“아니지 아니지. 히나짱이 코피까지 터트렸는데 그걸 그냥 잊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안 그래-?”
“에! 전 괜찮은데!!!!”
“아냐 아냐. 치비 짱. 내가 제대로 못해서 그런 거야. 그건.”
처음 2:2를 시작할 무렵은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그나마 나아진 편이었지만, 공이 히나타의 얼굴을 강타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계속 그의 손을 튕겨서 날아가는 일도 많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왜냐하면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아니었으니까. 카게야마처럼 정밀하게 공을 보낼만한 실력이 없었으니까.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계속해서 실수를 하는 자신을 마주할 때마다 울고 싶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은 대체 어디서 나왔던 것일까. 그 당시에는 발 밑이 차가워지는 감각을 몇 번이나 느꼈다. 그렇다, 다시 절망의 바다에 잠겨져가는 감각이다. 하지만 그 곳에서 오이카와를 끌어올려준 것은 히나타의 ‘한 번 더’라는 외침이었다. 코피가 나도, 계속해도 실패해도, 히나타는 계속 한 번 더, 라고 토스를 올려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 외침에 얼이 ᄈᆞ진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토스를 올렸지만 여전히 실패했다. 하지만 히나타는 전혀 개의치않고 다시 토스를 요구해오고 있었다.
‘그런 차가운 곳에서 절망하고 있을 시간은 없어. 그럴 시간에 이리 와서 나에게 토스를 올려줘’라고 강압적인 모습을 보이자, 오이카와는 어이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에게 토스를 올렸다. 그가 계속 토스를 올려달라고 말할 때마다 차가운 곳에서 벗어나는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연습하고 개선하고 다시 연습 한 결과, 카게야마에겐 미치지 못하더라도 납득 할 수 있는 형태의 속공이 나왔고, 이젠 그걸 제대로 쓸 수 있는 레벨까지 왔다.
“보바타!!! 대와아앙님! 나이스! 역시 대왕님!”
“역시 대왕님! 나이스!!! 보바타 대단해!”
“마지막 토스 정말 치기 쉬웠어! 대단해, 대왕님!!!”
“대왕님이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제발!!!!”
보바타의 마지막 스파이크로 인해 4:5 게임은 오이카와 팀의 승리로 끝났다. 후타마타 팀에서는 다음에는 두고 보자는 패자의 말이 들려오고, 오이카와의 팀에서는 오이카와가 그건 칭찬이 아니에요, 칭찬 좀 해주세요! 라는 절규만이 들려왔다. 분명히 그들은 칭찬을 하는 것이 확실할 텐데, 대왕님이라는 단어가 붙으니 욕을 듣는 것 같다. 절규하는 오이카와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일부러 그러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오이카와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나이스라고 외치며 하이 파이브를 원하는 듯이 두 손을 높이 올린 채 자신에게 쪼르르 달려오는 히나타를 원망스럽다는 얼굴로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그의 관자놀이를 주먹을 쥔 검지의 마디로 꾹꾹 누르며 비틀어주었다. 아프다며 소리를 지르는 히나타의 목소리 따윈 현재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히나타에게 이 울분을 풀고 싶었다.
“시끄럽다!! 거기!!! 얼른 뒷정리 해!!!”
하지만 아나바라의 호통과 함께 오이카와의 분풀이는 중지되어버렸고, 히나타는 그대로 선배들에게 끌려가 ‘아팠지, 오구오구’ ‘대왕님이 정말 나빠’ ‘대왕님이 나빴네’ 라고 위로당하고 있었다.
우와, 짜증나.
같은 후배인데 왜 취급이 다른 것인지. 처음엔 불만이었던 오이카와였지만 바로 이유를 알아채고 억지로 납득했다. 자신은 까기 좋은 후배, 히나타는 귀여워하기 좋은 후배다. 왜냐하면 히나타는 친화력이 높은 타입이었으니 말이다. 사소한 것도 자신이 멋지다고 생각하면 그 것을 솔직하게 눈을 빛내며 그렇게 주장한다. 그리고 말도 잘 들어주건 했다. 무엇보다, 히나타는 남을 대할 때 거짓으로 대하는 일이 드물다. 마음속 깊은곳에서부터 상대방을 존경하고 대단하다고 느끼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웬만큼 성격이 비뚤어진 녀석이 아니라면 쉽게 그와 친하게 될 수 있겠지. 안타깝게도 오이카와는 처음에는 툴툴거리다가 그에게 감화된 타입의 인간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서브하는 법 가르쳐 주세요’라고 눈치도 없이 다가오는 빌어먹을 후배에 비하면 100억 배는 귀여운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대왕님 대왕님! 최고였어요! 역시 대왕님은 대단해!”
방금 자신에게 화풀이 당했기 때문일까, 평소보다 두발자국 멀어진 채 눈을 빛내며 방방 뛰고 있는 히나타를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허탈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나 뛰어다녔는데 아직 방방 뛰어다닐 체력이 있다니. 얼마나 스테미너 괴물인 걸까. 코트 저편에는 지쳤다는 듯이 뻗어있는 테루시마와 후타마타가 있었다. 보바타가 여기 거대한 쓰레기가 있네, 라며 밀대로 쿡쿡 밀고 있는 걸 본 순간 봐선 안될 것을 본 듯한 기분에 오이카와는 다시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원래 세계’에서는 접점도 없으니 절대 친해질 것이라 생각하지도 못했다. 물론 토스를 올려주고 싶다고는 생각했지만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미래는 역시 알 수 없는 법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떡였다.
“치비짱도 꽤나 칠 수 있게 되었네. 대단해. 대단해.”
“공중전이 제 특기니까요! 갈고 닦지 않으면! 하지만 대왕님이 더 대단해요! 이 곳에 공이 왔으면 하는 동시에 공이 날아오는데요!!!”
“그래도, 토비오 짱의 토스가 더 낫잖아?”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왜 이런 말이 나와 버린 걸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히나타를 내려다보면 히나타의 얼굴에서도 표정은 사라져있었다. 또 말실수 해버렸다. 평소에는 안 그랬는데, 유독 이곳에 오고 나서 말실수를 계속 하는 것 같았다. 미안해. 라고 사과하기 전에 히나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왕님. 카게야마의 그 토스는 카게야마 밖에 올리지 못해요.”
히나타의 말에 오이카와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 말에 꽤나 동요한 모양이었다. 어째서일까. 지금 히나타가 말하는 것이 진실인데 어째서.
‘아니, 답은 알고 있어.’
하지만 그걸 인정하기 싫다. 어린아이의 생떼 같지만 인정하기 싫었던 오이카와는 일부러 머릿속에서 떠올린 그 답을 모른 척 하고 있었다.
“-라고, 예전에 스가와라 씨가 그랬어요.”
“스가와라? 아아, 그 상쾌군인가.”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 그의 옛 선배이자 짜증났던 선수를 떠올리며 오이카와는 물을 꼴깍꼴깍 소리가 나게 들이켰다. 아마 카게야마보다 실력이 떨어져 주전 자리를 빼앗겼었던 선배, 이었었던가. 부정적인 이미지로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떻게든 열심히 생각해보려다가 왜 굳이 생각해내야 하는 걸까, 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는 도중에도 히나타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확실히 카게야마 녀석의 토스는 굉장해요. 원리나 기술은 잘 모르겠지만 슉하는 동시에 파악, 하고 공이 이쪽으로 오니까요! 그녀석이 그랬듯이 그녀석도 제가 있으면 최강이었어요. 하지만 그 속공은 이제 쓸 수 없어요.”
“……….”
“대왕님과의 속공이 카게야마와의 속공보다 더 좋다. 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어요.”
히나타의 솔직한 고백에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었다. 이게 계속 눈을 돌려온 답이다. 자신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토스실력으로는 카게야마를 이기지 못한다. 예전에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곳에 온 후로부터는 정신을 놓으면 그 시절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알고 있다. 그러니까 자신이 해야할 일은 하나. 그것은-.
“그래도, 저는 이 속공을 최강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언젠간 대왕님이 올려줬던 토스로, 카게야마와 했던 속공을 넘어서고 싶어요!!”
“나와의 속공이 토비오 짱의 속공보다 더 좋다고 말하게 해주겠…. 으응?”
그들이 동시에 내뱉은 말은 달랐지만 의미는 같았다. 한 순간 서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기 위해 입을 다문 채 머리를 정리한 두 사람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동시에 씨익 웃었다. 서로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기뻤는지 오이카와도 히나타도 똑같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네-네. 둘이 뜨겁다는 건 알겠으니까 얼른 가서 밀대 가져와. 얼른 얼른 뒷정리하고 돌아가야지! 특히 오이카와! 너는 서두르지 않으면 기숙사 문 닫힌다!”
“아, 네!!!”
옆에서 밀대 질을 하고 있던 누마지리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째서인지 누마지리와 츠치유는 오이카와와 히나타는 사귀고 있는 거 아냐? 라는 의혹을 품고 있었다. 물론 부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두 사람은 오이카와와 히나타가 수상하다고 뒤에서 계속 수군거리고 있었다. 저번까지만 해도 쟤네들 사귄다. 라는 소리만 나와도 바로 대응한 두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지쳤는지 아아아, 그러세요. 그런가봐 요. 라는 대응을 하기 시작했다. 소문 좋아하는 아줌마 같은 제스쳐를 취한 채 이야기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을 지나쳐, 히나타와 오이카와는 창고로 들어갔다. 뒤에서 우리것도 좀 꺼내줘, 라고 주장하는 테루시마를 무시할 수 없던 오이카와는 크게 한숨을 쉰 뒤 히나타와 함께 선배들 몫의 밀대걸레를 갖고 나왔다. 어차피 내년부터 다시 후배로써 시작하면 똑같은 일을 당했을테니까, 라고 자신을 납득하고 있으면, 선배들에게 밀대걸레를 나누어주고 온 히나타가 오이카와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그래도 대왕님.”
“응?”
오이카와에게 걸레를 받으며 히나타가 입을 열었다.
“저, 처음에는 불안했는데. 대왕님이 있어주셔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히나타가 말하는 것은 속공에 대해서라고 생각하겠지만, 오이카와만은 히나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 세계에 자신이, 오이카와 토오루가 있어줘서 다행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속공 때문이겠지. 그냥 같은 처지에 있어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겠지. 라는 비뚤어진 생각이 순간 떠올랐지만, 그 무엇도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나도.”
그저 히나타의 주황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머릿속에 떠오른 말과 정 반대의 대답을 입에 담았다. 오이카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이 세계에 와서 불안하고, 막막하고, 제대로 배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저것 밀려오는 불안감에 떨고 있을 때 그는 짠하고 나타나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물론, 말 안 할거지만.’
오이카와는 자존심이 센 편이었다.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말로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너무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까. 정리를 하고 있던 미사키에게서 놀지만 말고 얼른 청소하라며 일갈을 날렸다. 그들에게 죄송하다고 큰 소리로 외치며, 히나타와 오이카와는 급히 걸레를 들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 * *
“너희들. 이번 휴일에 뭐할 거야?”
뒷정리가 끝나고 옷을 갈아입는 도중 달력을 흘깃 바라본 이이자카가 무심하게 내뱉자, 그걸 물어봐주기를 원했다는 듯이 테루시마가 손을 들고 외쳤다.
“나나! 나는 친가로 돌아가서 밀린 게임 할 거야!!”
“연습도 해야지.”
“공부도 해야지.”
“니들이 언제부터 내 보호자였다고!!!”
기다렸다는 듯이 테루시마에게 맹공격을 가하기 시작하는 선배들을 먼눈으로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여전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좀 익숙해져야지. 살짝 두통이 오는 것 같은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고 있으면, 억울하다는 듯이 테루시마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물론 개인 훈련도 할 거라고??? 니들 내가 맨날 농땡이만 피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나는 평소에도 훈련하고 있어!! 그치?? 대왕님!!”
“대왕님이라고 제발 그만하세요! …아, 그래도 선배 말이 맞아요. 평소에도 근육 트레이닝 같은 거 하고 있고.”
“알고 있거든? 그리고 근육 트레이닝뿐이겠냐. 배구공 갖고 뭔가 하다가 어제 사감선생님이 출동한 거 우리가 모를 줄 알았냐.”
“너희들 은근 유명하다고?”
“잠깐만요, 왜 ‘너희들’이에요?? 왜 저도 엮이는 거죠?? 저는 아무 잘못도 안했는데요???”
“같은 방이잖아.”
후타마타의 대답에 오이카와는 입을 닫았다. 확실히 같은 방이라는 이유로 테루시마와 함께 사감에게 끌려가는 일이 많았다. 공을 몸의 일부처럼 착각하게 할 만큼 공을 많이 만져라. 옛날 인터넷 서핑을 할 때 보았던 글귀대로 쉬는 시간에도 공을 만지고 있으면, 테루시마는 그걸로는 부족하다며 살짝 공을 던졌다 받았다 하면서 그 나름대로 공을 손에 익히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 행동에 대해서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 공이 천장에 부딪치거나 벽에 부딪치거나 바닥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면 말이다. 덕분에 옆방과 윗방에서 클레임이 들어왔고, 어제는 사감 선생님까지 출동해 배구공을 압수해갔다. 하지만 그것에 굴복하지 않은 테루시마와 오이카와는 체육관에 있는 배구공을 빌려가려다가 아나바라에게 엄청나게 혼났다. 결국 방 안에서는 절대 배구공을 만지지 말 것, 이라는 각서를 쓰고서야 두 사람은 자유가 될 수 있었다.
“오이카와. 진지하게 말할게. 너 이러다가 제 2의 유우지가 되버린다. 그럼 네 인생은 끝장이야.”
“야 이 속에 시커먼 게 가득 차 있는 놈아!!! 나는 바이러스가 아냐!!! 너 계속 그렇게 예쁘게 말 하다간 언젠간 찔린다!!!!”
“내가 너도 아니고 그런 실수를 저지르겠냐.”
“저 재앙의 주둥이가!!!”
후타마타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테루시마가 바로 반박에 나섰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어디까지나 후타마타의 비웃음이었고, 열이 머리에 오른 테루시마는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잘못하다간 큰 싸움으로 번질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다른 2학년들은 오랜만에 한 판 붙는구나…. 라는 안쓰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가 하면, 누가 이길까, 라고 내기를 하는 선배들도 있었다.
-정말 이 배구 부 괜찮은 걸까.
히나타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할 줄 모른다는 표정을 지은 채 성대하게 말싸움을 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괜찮아. 쟤네들은 저렇게 우정을 쌓아 가는 거니까. 그냥 너희들은 우리처럼 먼발치에서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면 된다고 생각해!”
“……………따뜻한 눈.”
“아니, 선배들 아무리 봐도 따뜻한 눈은 아니니까요???”
“신경 쓰면 지는 거란다. 히나 짱. 오이카와.”
얼른 갈아입으라는 듯이 보바타가 두 사람의 등을 탁하고 치고 가버렸다. 이 배구 부, 정말 괜찮을까. 걱정이 들었지만 생각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생각한 오이카와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얼핏 평등해보이기는 하지만 이 조센지 배구부에도 엄연히 까이는 존재와 까는 존재는 존재한다. 후배이기도 하고, 놀리기 좋아서일까. 오이카와는 물론이고 히나타도 장난으로 툭툭 이것저것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 많이 놀림당하는 것은 테루시마였다. 이이자카가 아니면 후타마타와 자주 이렇게 투닥투닥거리는 걸 흔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뭐, 일정 선을 지켜주고 있는 걸 보면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이게 조센지 배구부의 특유의 분위기인 걸까. 어떻게 보면 세이죠와도 닮아있었지만 전혀 틀리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여기서 자신이 있던 세이죠의 배구부의 모습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마다 자괴감이 든다. 여기는 조센지 배구부다. 세이죠가 아니다. 그렇게 자신에게 되뇌이며 단추를 잠그고 있으면, 어느새 교복으로 갈아입은 히나타가 오이카와의 옆에 쪼르르 달려왔다.
“대왕님 대왕님. 골든 위크때 어떻게 하실거에요? 어디 머물 곳 있어요?”
“? 아니. 기숙사에 있을 건데.”
히나타의 질문에 위화감을 느꼈지만,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오이카와가 딱 잘라 말했다. 집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물론 ‘이 세계의 오이카와’의 흔적이 보기 실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이와 짱을 보기가 힘들어.’
될 수 있다면 만나고 싶다. 하지만 저쪽에서는 오이카와를 만나는 것을 꺼려하고 있었다.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이것저것 짤막한 정보로 추측해보면, ‘오이카와 토오루’가 배구를 관둔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듣고 싶기는 하지만……….’
저쪽이 이쪽을 보기 싫어하니 기회가 없다. 게다가 ‘오이카와 토오루’는 교우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는지, 친구가 없었다. 얼마나 슬픈 인생이야. 아니, 내가 이렇게 막 살았나. 분명히 자신이 아닌데 창피해서 죽을 것만 같다. 유일하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엄마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녀도 자세한 상황은 모른다고 했다. 그에게 직접 묻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기에 확 이와이즈미를 잡아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 일’이 있던 후 오이카와도 이와이즈미를 만나는 것이 꺼려졌다. 그래서일까. 집으로 돌아가면 그를 만날 것 같았기에 그다지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응? 야. 오이카와. 공지 안 봤냐.”
“공지요?”
“골든 위크 기간에 기숙사 보수공사 하니까 다 나가야한다고 올라왔잖아.”
“……네?”
이이자카의 정보에 오이카와는 순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골든 위크 기간에 기숙사에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점점 멍청해져가는 표정을 짓고 있는 오이카와가 우스웠는지 히가시야마와 보바타가 키득거리며 오이카와의 볼을 번갈아가며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초를 있었을까. 급히 휴대폰을 꺼낸 오이카와는 기숙사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농담이어라. 농담이어라. 농담이어야 해. 스크롤을 내리는 손가락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오이카와는 애써 무시하며 페이지가 뜨는 것을 기다렸다. 로딩시간이 1시간처럼 느껴진다. 로딩 바가 파란색으로 변하고 페이지가 열리자, 옆에서 모든 상황을 보고 있었던 누마지리가 화면을 가리켰다.
“여기 있네. 기숙사 보수공사에 대하여.”
“……세상은 잔혹해.”
그의 말대로 공지에 기숙사 보수공사, 라는 제목을 본 오이카와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이게 무슨 일이람. 아니, 애초에 집에서부터 이 곳까지 통학하기에는 너무 멀다. 세상이 끝난 표정으로 크게 한숨을 쉬면, 선배들도 분위기를 읽었는지 싸움을 중단하고, 더 이상 놀리지 않고 오이카와를 토닥여주었다.
“…………우리, 골든 위크 때 합숙 안하나요?”
“안 해.”
“왜요!! 왜 학교는 허락 안 해주는 건데!!!”
한 가지 희망을 품고 조심조심 물어보았지만 주위에서 돌아오는 반응은 싸늘 그 자체였다. 물론 골든 위크 시기가 오자 히나타가 아나바라에게 합숙은 안하냐고 물었을 때 그에게서 ‘학교에서 허락 안 해주니까 3일은 체육관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고 4일은 쉰다.’라는 대답을 확실히 들었다. 방금 전의 질문은 그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사람의 발버둥이었다.
“예전에 다른 부의 OB가 합숙할 때 사고 친 이후로는 학교에서 합숙 허락 안 해준대”
“학교오오오!!! OB-!!!!!!!!!!!"
왜 학교는 다른 부가 사고를 쳤으면 그 부만 합숙을 정지시킬 것을 왜 다른 부까지 피해를 주는 걸까. 오이카와의 절규에 동의하는 듯이 히나타도 고개를 심하게 끄떡였다. 하지만 여기서 주장해봤자 바뀌는 것은 없는데다, 오이카와에게는 더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큰일이다. 일주일 동안 지낼 곳이 없어.’
‘저쪽’에서라면 하나마키와 마츠카와의 집에 굴러 들어가면 될 텐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친구가 없다. 친구 한명정도는 만들어 놔라. 망할 토오루 놈아. 이쪽의 자신을 욕해보아도 사태는 변하지 않는다. 그냥 기숙사에 몰래 숨어있을까. 극단적인 생각을 하며 오이카와는 얼빠진 표정으로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고선 탈의실 밖으로 나갔다.
* * *
5월에 가까워져서일까. 날이 저물어도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까. 정말 돌아가는 수 밖에 없을까. 감독에게 사정을 말한다면 조금의 지각은 봐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집에서 있을 시간이었다. 4일 동안 그냥 방에만 쳐 박힌채 커튼도 닫고 있으면 이와이즈미와의 접점은 없지 않을까. 최대한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이와이즈미와 만나지 않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으면, 뒤에서 대왕님, 이라고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비 짱.”
“대왕님. 집에 돌아가기 싫어요?”
“하하하. 치비 짱은 정말 망설임 없이 이것저것 묻는 구나. -그래. 가기 싫어.”
상대가 히나타여서일까. 오이카와의 입에서 긍정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상대방이 대응하는 방식이 싫어서였다. 물론 변명을 하라고 하면 변명은 할 수 있다. ‘저 예전에 머리를 다쳐서 기억상실증에 걸렸거든요. 그런데 어머니의 눈빛도 불편하고, 그 방에는 옛날에 흔적이 잔뜩 있어서 돌아가기가 꺼려져요.’ 라고 웃으며 거짓말을 하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이 대답이 오이카와는 두려웠다.
-어차피 지금뿐이잖아. 기억을 되찾으면 또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텐데.
……아니야.
-뭐가 아니야. 아닐 거란 보장이 어디 있어. 나는 이미 너에게 실망했는데.
인간의 기억이란 흙탕물 같은 것이다. 평소엔 물 밑에 가라앉아있으면서도, 살짝 자극만 줘도 그 물은 흙탕물이 올라와 더러워지건 한다. 그것처럼 살짝 흔들기 만해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까지 떠올라버린다.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수면위로 올라오자 오이카와는 이를 꽉 악물었다. 만나고 싶지 않다. 만나서 해명을 하고 싶다. 만나서는 안 된다. 상반되는 바람이 파도처럼 밀려와 오이카와의 목을 조여 왔다. 숨이 턱 막히는 감각. 오랜만에 찾아온 감각에 오이카와는 무심코 목을 잡았다.
“대왕님?” “!!!!”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감각은 히나타가 오이카와의 옷깃을 잡자 언제 있었냐는 듯이 훅하고 사라져버렸다. 놀란 표정으로 히나타와 그가 잡은 옷깃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는 오이카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히나타는 무언가 생각에 잠기더니,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오이카와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 시선이 너무나도 강렬했던 탓일까. 오이카와는 당황하며 무심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히나타는 굴하지 않고 오이카와가 물러난 만큼 한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대왕님!!!”
“으, 으응. 왜 그래? 치비 짱?”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걸까. 제 3자의 시선으로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지만 역시 현재 오이카와가 처해있는 상황은 이상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히나타는 자신의 옷깃을 잡고 긴장한 얼굴로 무언가를 말하려 하고 있고, 그 모습을 본 오이카와의 뇌리에는 누마지리의 ‘니들 고백은 언제 하냐-?’라는 헛소리가 떠오르고 있었다. 왜 이게 지금 떠오르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오이카와는 손에 식은땀이 흥건해지는 감각을 받았다.
설마. 아니겠지. 고백일리 없잖아. 왜 나는 고백일거라 생각하는 거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일까.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히나타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딱딱하게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 오이카와의 망상에 더욱 더 박차를 가해주었기 때문일까.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자신은 여자가 좋은데다, 히나타와는 좋은 관계이자 동료만으로 남고 싶다. 라는, 미래의 자신이 들으면 어처구니 없을만한 문장이 떠돌고 있었다.
‘응. 거절하자.’
그렇게 결심한 오이카와는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죄악감이 슬슬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자신은 히나타에게 연애감정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치비짱. 나는 그 마음-”
“저희 집에 오실래요??!!!”
오이카와가 거절의 말을 입에 전부 담기 전에 히나타가 먼저 소리쳤다. 그리고 그 내용이 자신이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머릿속으로 인식한 순간 오이카와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뭐라고 했어? 치비 짱?”
“그, 그러니까! 골든위크 동안 우리 집에 오시라고요!!”
다시 한 번 히나타에게 방금 전 했던 말을 요구하자, 히나타는 빽하고 소리 지르면서도 친절하게 방
금 했던 말을 한 번 더 이야기해주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제대로 인식한 오이카와는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혀까지 굳어버린 모양인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 그 말을 왜, 긴장, 하면서.”
“그야 상대가 대왕님이니까요! 게다가 저 선배에게는 이런 말 하는 거 처음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긴장 됐다고요!”
“……….”
즉. 히나타의 말을 정리해보면, 그가 이 말을 꺼낼 때 눈에 띄게 긴장한 것은 어디까지나 오이카와가 선배여서였지,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창피해!!!!!!!!!!!!’
창피하다. 엄청 창피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바닥에 주저앉으면, 머리 위에서 히나타가 왜 그러냐고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오이카와는 거기에 대답해줄 기력이 없었다. 창피하고 창피해서 지금 당장 쥐구멍을 찾아 거기에 들어가고 싶었다. 분명히 기숙사에서도 자다가 생각나서 이불을 빵빵 차겠지. 이게 다 누마지리와 츠치유 때문이다. 그들이 계속 이상한 말을 해서 자기도 모르게 그럴지도 모른다고 세뇌되어버린 것이 틀림없다. 10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과거의 자신을 패 죽이고 싶다. 츠치유와 누마지리에게 나중에 커다란 보복을 해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오이카와는 창피와 수치심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얼굴의 열이 가라앉지 않는다. 히나타에게 미안, 잠시만이라며 양해를 구하며 대답을 미루고 있으면, 히나타도 오이카와처럼 쭈그려 앉아 오이카와가 진정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대왕님. 저희 집 올 거에요?”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참는데 한계가 온데다 이제 괜찮다고 판단했는지 히나타가 묻자, 오이카와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가락을 2대 2로 나누고선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히나타를 흘깃 바라보았다.
“…………갈래.”
물론, 그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