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4. 03:09

5.

 

골든 위크 4일째. 오늘부터 조센지 배구부를 포함한 체육계 부 활동은 휴일에 들어간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체육관도 잠기게 되어 그 곳에서 배구를 하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평소라면 그 사실에 절망할 오이카와와 히나타였지만, 절망할 여유는 없었다. 두 사람에게는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있었으니까.


-이와이즈미를 만나러 간다.


그 자리의 공기에 휩쓸려서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실은 오이카와도 정말 이와이즈미를 만나고 싶었기에 그렇게 결정했다. 각오는 했다. 하지만 막상 D-day에 가까워질 때마다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히나타도 마찬가지였는지 시간이 지날 때마다 점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제안자가 그렇게 긴장하면 어쩌자는 거야. 반쯤 장난으로, 반쯤은 진심으로 그렇게 이야기해보아도 히나타의 긴장은 더욱 가속화할 뿐, 나아질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누군가가 자신보다 긴장하면 오히려 자신은 긴장하지 않는 법칙이 적용된 효과여서일까. 아니면 하도 긴장을 해서 마비가 되어버린 것일까. 어느 쪽의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오이카와는 긴장에서 꽤 벗어날 수 있었지만 문제는 히나타였다.

다행히 배구를 할 때나 이와이즈미를 만나러 간다라는 것을 잊고 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그 사실을 떠올리고 난 후에는 온 몸이 빳빳하게 굳어져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감독도 미사키도 다른 선배들도 히나타가 갑자기 긴장을 하기 시작하면 히나타를 걱정하거나, 오이카와에게 너 또 히나 짱 괴롭혔냐고 시비가 걸려오건 했다. 계속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리는 것도 한계였기에, 결국 치비 짱에게 공부를 가르쳐줬더니 이렇게 되버렸어요!!!’라고 자신이 들어도 어이가 없는 이유를 대버렸다.


이 말을 꺼냈을 때의 히나타의 경악한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 에요. 대왕님. 그런 설정 없었잖아요. 라며 뒤에서 히나타가 오이카와를 탓하는 표정으로 강렬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이제 와서 뻥이에요, 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이 변명은 꽤나 그럴 듯 했는지 모두가 그렇구나, 하고 납득해주었다. 오이카와도 히나타도 이렇게 쉽게 납득해줄 지는 몰랐는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 서있었지만, 두 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아나바라의 중간고사 기대하마라는 한마디와 격려가 담긴 토닥임을 받고서야 그제서야 오이카와는 심각성을 깨달았다. 히나타의 점수가 올라가지 않으면 자신의 책임이 된다. 그리서 선배들은 이렇게 말하겠지. ‘대왕님은 남을 가르치는 재능이 없구나-’라고. 프라이드가 높은 오이카와는 그것만큼은 싫었는지 그 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히나타의 공부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딴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 히나타의 긴장이 한동안 풀렸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이야기다.


그리고 D-day가 찾아왔다.


다시 히나타의 집으로 올 예정이었기에 오이카와는 간단한 짐을 들고 히나타와 함께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조센지에 입학한 뒤로 한 번도 돌아가지 않았던 집에 이런 형태로 돌아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상은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다. 라고 생각하며 오이카와가 한숨을 쉬었다. 히나타의 앞에선 가볍게 이야기 했지만, 실제로 오이카와는 배가 따끔따끔 아파올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히나타의 앞에서는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히나타처럼 고장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와이즈미는 자신을 만나줄까. 이야기를 들어줄까. 전 날에는 걱정과 시뮬레이션을 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 불안감을 지우려고 하는 행위가 오히려 더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오이카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진정하자, 진정해. 토오루.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잖아. 목적지까지 꽤 시간도 걸리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떻게 해.’


계속해서 주먹을 쥔 손에 식은땀이 흥건해지자, 오이카와는 그것을 얼버무리려는 듯이 계속해서 바지에 손을 벅벅 문지르는 일을 반복했다. 거기에 계속 목이 탔기에 계속해서 물을 마셔봤지만, 그걸로 갈증이 해소 되지 못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 까지 자는 게 좋겠지만, 긴장 때문에 잠이 오질 않는다. 요 근래 이렇게나 자신을 제대로 컨트롤 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던가. 정신도 16살 때로 돌아간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면, 갑자기 옆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욱.”


착각이 아니라면, 이 소리는 분명 뱃속에 들어있던 것이 목구멍으로 올라올 때 내는 소리다. 불길한 소리에 급히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그 곳에는 어느새 준비했는지 검은 봉다리에 얼굴을 박고 있는 히나타의 모습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내릴께요!!!”


상황이 긴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창피하다는 생각도 떨쳐버린 채 얼른 내리겠다는 버튼을 누르며, 오이카와가 소리쳤다. 이 순간만큼은 이와이즈미를 만나러간다는 생각을 지운 채 오이카와는 서둘러 히나타를 데리고 이름모를 정류장에 내렸다.

 


* * *

 


. 만 엔.”


자신의 지갑에 딱 한 장 들어있는 1만엔을 보고 오이카와는 자판기 앞에서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주머니를 뒤져도, 짐을 뒤져도, 히나타의 짐과 지갑을 뒤져도 1만 엔과 97엔 이상의 돈은 나오지 않았다. 둘이 합쳐 소지금 297. 큰 액수였지만 이걸로 눈 앞의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먹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1만엔 을 집어넣어보았지만 자판기는 친절하게도 1만 엔을 뱉었다, 다시 돌려주었다. 적어도 3엔만 더 있었다면 뭔가 살 수 있었을 텐데. 3엔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깨달은 오이카와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자판기와 벤치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중요한 물을 구입할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한 모금 정도는 남겨두는 건데.’


계속해서 목이 타는 바람에 비워버린 빈 패트 병에 화풀이를 하며 오이카와는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돌려보면 영혼까지 검은 봉다리에 토해 내버렸는지 탈진해 있는 히나타가 보였다. 얼른 물을 먹여줘야지 살아날 것 같은데, 지금 현 상황으로 그에게 수분을 섭취하게 해주는 것은 무리였다.


정말이지, 귀찮게 하네.’


원래부터 마음이 못 되어먹은 오이카와는 이 상황에서 자비롭게 아아, 괜찮아. 신경 쓰지 마라고 해줄 정도로 상냥한 위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환자에게 화를 쏟아낼 정도로 마음이 독하지는 못했다.


치비 짱, 이따가 두고 봐!!!!”


현재 오이카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 한마디만을 남기고 근처의 가게를 찾아 달리는 것 뿐이었다. 0 지도에 따르면 여기서부터 약 15분 거리에 작은 가게가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거기에 희망을 걸 수 밖에 없었다. 만약에 그 곳이 문을 닫았다면 또 15분을 달려서 전전 정거장에 있던 슈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만큼은 싫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오이카와는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결과, 오이카와는 두 정거장 전의 근처에 있는 슈퍼에 와 있었다. 오이카와의 예상대로 첫 가게는 문을 닫아있었고, 결국 오이카와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두 번째 정거장으로 뛰어갈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슈퍼는 문이 열려있었고, 오이카와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물과 드링크, 그리고 멀미약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 이거 버스가 더 빠른데...”


이 무거운 짐을 들고 30분가량을 달리는 것 보다 15분을 더 기다려서 버스를 타고 그 정류장으로 가는 것이 더 빨랐다. 왜 이렇게 애매한 시간인 걸까. 버스정류장에 붙어있는 시간표를 노려보며 오이카와는 잠시 고민하더니, 곧 크게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열었다.


뛰어가도 버스가 치비 짱이 있는 곳에 먼저 도착할 것 같고 말야.”


그러니까 이 선택은 어쩔 수 없다. 절대 절대 자신이 매정해서 얼른 히나타에게 가지 않고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이게 가장 합리적이고 체력을 아끼는 길이다. 마음 속 어디선가에서 현재의 자신에게 매정한 것이 아니냐고 손가락질을 하는 또 다른 자신에게 변명을 하듯이 머릿속으로 변명에 비슷한 생각을 떠올리며, 오이카와는 히나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오…….”]


얼마간의 통화음이 울렸을까. 평소와 달리 기운이 없는 목소리의 히나타의 목소리가 스피커너머에서 들려왔다.


치비 짱, 오이카와 씨인데, 괜찮아? 몸은 좀 어때?”

[“괜찮아요오. 물도 마셨고, 조금 쉬면, 괜찮아질지도.”]

얻어 마셔? 옆에 누구 있어?” 


방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두 사람의 수중에 음료수를 살 수 있는 동전과 지폐는 없었다. 그렇기에 히나타가 자력으로 음료수를 사서 마셨을 리 없다. 그렇다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는 결론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런 곳에 내리는 이상한 사람도 다 있네.’


오이카와와 히나타가 내린 그 곳은 이 곳이 정말 정류장인가, 라고 할 정도로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장소였다. 아니, 자판기와 벤치는 있으니 아무것도 없다는 표현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곳에 사람이 있다니, 그 사실이 왠지 께림직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거긴 정류장이라고. 토오루. 누가 있어도 이상하진 않잖아.’


순간 범죄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이상한 가정을 고개를 털어 없앤 오이카와는 목 언저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일단 다행이네. 실은 뛰어가는 것보다 버스타고 가는 게 더 빨리 도착할 것 같거든? 오이카와 씨가 올때까지 착하게 있을 수 있어-?”

[“, ! 아니아니. ! 버스타고 와! 짐 지키면서 기다리고 있을게!”]


스피커 너머에서 히나타가 힘없이 웃는 것이 들려왔다. 말을 걸어도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던 처음과 비교하면 그나마 괜찮아진 편이지만, 그래도 평소와 비교한다면 힘이 없다는 것은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그걸 생각하니 지금 당장 그의 곁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체력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이득이라고 되뇌이며 오이카와는 표지판에 붙어있는 시간표를 바라보다가, 근처의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 보니 혼자가 된 건 진짜 오랜만이네.’


골든 위크에 돌입한 이후로 계속 히나타의 집과 학교만을 오가고 있었기 때문일까, 오이카와의 혼자만의 시간은 화장실과 샤워를 하는 시간 외에는 없었다. 오랜만에 의도치 않게 혼자만의 시간을 얻었지만, 그리 즐겁지 않은 건 분명히 히나타가 마음에 걸려서다. 그 사실에 짜증이 난 오이카와는 애꿎은 돌맹이만을 차 보았지만 마음속에 생긴 응어리는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전부 치비 짱 때문이야.’


그가 멀미로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안절부절 하고 걱정되는 마음으로 버스를 기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크게 한숨을 쉬었다.


더 이상 치비 짱이 민폐라고 생각하는 건 관두자. 제발. ’


확실히 히나타는 일을 키우는 타입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 민폐라는 것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숨을 쉴 수 있게 해주었다. 그가 끌어내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오이카와는 아직까지도 모든 것을 보지 못한 척을 하며 도망다니다가 마지막엔 망가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치비 짱에게 감사해야해.’


히나타에게는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가 있었기에 오이카와는 조센지라는 들어보지도 못한 학교생활에 녹아내릴 수 있었고, 새로이 다시 시작해보자고 다짐도 할 수 있었던 데다가, 이렇게 이와이즈미와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그와 제대로 마주하려 움직일 수 있었다. 만약 히나타는 표류동료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분명 오이카와는 지금처럼 여유와 편안함을 가질 수 없었을 테고, 이와이즈미에게서 계속 도망 다니고 있었음이 틀림없다라고 오이카와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실망했다. 언제나 자신이 바보 같은 짓을 하면 엉덩이를 걷어 차주고, 잔소리를 하고, 이끌어주고, 믿어주었던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이곳의 그는 오이카와가 알던 이와이즈미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든 것은 이 곳의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상냥한 말은 물론 욕도, 자신의 바보 같은 행동과 발언에 태클도 걸어주지 않는데다 잔소리도 해주지 않았다. 그가 오이카와를 포기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완전히 혼자가 되어버렸다. 그 사실에 절망하고 있는 오이카와를 히나타는 손을 잡고 여기까지 끌어주었다. 오이카와가 계속 툴툴거리고 고압적인 태도를 보여도 히나타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끌어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감사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않는가. 문제는 자신이 그 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청개구리처럼 그에게 화만 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 매일매일 다짐은 하지만, 언제나 마지막은 자기혐오와 반성으로 끝나버린다.


분명 이유는 그거겠지. 내가 치비 짱을 자신과 똑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거.’


이 시간 축에 표류해 온 시점에서 오이카와도 히나타도 별 다르지 않다. 오이카와가 원래는 히나타 보다 2살 가량 많다 해도, 여기서는 똑같이 1학년이고, 원래 갖고 있던 스텟도 어느 정도 깎인 상태였다. 토스 실력, 체력, 리시브 솜씨, 점프의 높이. 전부 3학년의 오이카와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런 주제에 자존심만은 3학년의 자신 그대로였기에 오이카와는 무의식적으로 히나타를 자신보다 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치비 짱만이 아냐. 나도 생각을 바꿔야해.’


생각이나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머리를 세게 쳐 기억이라도 잃지 않는 한 이 빌어먹을 생각과 사고방식이 바뀌는 일은 없을 테지. 그러니 이 나쁜 점이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다.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을 고개 들어 바라보았다. 느긋한 광경에 방금 전까지 바빴던 일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아니까.’


노력하지 않고서 결정짓는 것은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기에 지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는 오이카와는 포기할 생각은 추오도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머릿속에 제일 먼저 클리어 해야 할 난관을 떠올리며 오이카와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 버스가 오고 있다는 것을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오이카와는 100엔과 정기권을 꺼내들고서는, 자신 앞에 정차해달라고 말하듯이 크게 손을 흔들었다.

 

* * *

 

어디학교-”


버스에서 내리면, 기다렸다는 듯이 히나타가 자신에게 뛰어오거나, 적어도 대왕님이라고 큰 목소리로 외칠거라 멋대로 생각했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런 오이카와의 예상을 깨듯이 처음 들려온 것은 대왕님이라는 히나타의 목소리가 아닌, 3자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삼색 고양이였다. 귀찮았는지, 아니면 일부러 그렇게 하려는 것인지 그는 금발로 염색한 주제에 뿌리 염색을 하지 않은 채 방치해놓고 있었다. 거기다 눈매까지 고양이를 닮은 탓일까, 검정색과 노란색, 그리고 어울리지 않지만 빨간색. 이렇게 3색이 섞인 고양이로 보였다. 하얀색, 노란색, 붉은색. 보통 붉은색이 들어가야 할 장소에 하얀색이 들어가지만 오이카와가 굳이 붉은 색을 넣은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입고 있는 운동복이 상의도 하의도 눈이 아플 정도는 아니지만 눈에 확 들어오는 빨간색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 누구?’


방금 전 통화 내용을 떠올려보면 아마도 이 소년이 히나타에게 물을 준 사람일지도 모른다. 소년을 바라보며 머릿속에서 이것저것 추측하고 있으면, 오이카와의 시선을 피하듯이 소년이 몸을 움츠렸다. 여전히 시선은 손에 들려있는 비타에 가 있었지만 딱 봐도 나는 당신의 시선이 불편해요라고 말 없이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면 자신이 소년을 괴롭히고 있는 걸로 보이지 않는가. 불쾌하다는 듯이 오이카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자, 그 모습을 발견한 히나타가 그 모습을 지적하며 목소리를 높혔다.


아아!! 대왕님이 켄마 괴롭히고 있어!!!”

, 아니야! 치비 짱! 오이카와 씨는 누군가 하고 궁금해서 본 것 뿐이야!!!”


정말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오이카와가 반론했다. 자신은 그저 그가 히나타가 말한 사람인가, 하고 본 것뿐이었는데. -라고, 본인은 생각하고 있지만 3자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오이카와는 켄마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있다라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문제는 오이카와가 그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두 사람은 뚱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튼 치비 짱, 해야 할 말은?”


약과 드링크가 든 봉지를 들어 올리며 오이카와가 살짝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너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했다. 라고 생색을 낼 생각은 아니었지만 오이카와가 온 것을 기뻐하는 것 보다 생판 모르는 남을 먼저 챙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오이카와는 유치한 수법을 썼다. 부스럭, 거리며 눈앞에 나타난 비닐봉지를 죄악감 넘치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히나타는 곧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알면 됐어 알면. 옛다.”


오이카와가 봉지를 내밀자 히나타는 최대한 고개를 숙이며 그 봉지를 받았다. 너무 생색을 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도 했지만 나쁜 것은 히나타며,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이정도 해도 괜찮다며 속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자신이 고생하는 사이에 제 3자가 나타나 상황을 파파밧, 정리해버렸다. 그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히나타는 켄마의 편만을 들고, 덕분에 오이카와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현재 히나타와 동갑이라고 해도 정신연령은 그보다 위다. 그러니까 좀 더 어른스럽게 대처하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막상 결과는 이 꼴이다. 크게 한숨을 쉬며 오이카와는 봉지의 내용물을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있었다.


일단 더 가야하니까 약은 한 번 더 먹어두고. 물은 아까 전에 먹었다고 했지? 화장실이 급해지면 곤란하니까 적당히 먹고.”

그런 것 치곤 물이나 스포츠 드링크가 많은 것 같은…….”

물은 많이 있어도 괜찮다구? 또 물 없어서 중간에 내리게 되면 곤란하고 말야.” 

, 고맙습. 아니, 고마워.”


오이카와의 설명에 따라 유리병에 담겨있는 멀미약을 마시는 히나타를 잠시 바라본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켄마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이카와와 눈이 마주치자 켄마는 살짝 움찔하더니 다시 시선을 비타로 돌렸다. 그러니까 괴롭힐 생각은 추호도 없다니까.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며 오이카와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저 애가 도와준 애? 아는 사람이야?”


방금 전부터 히나타는 그를 켄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켄마라는 단어는 성보다 이름이라고 생각했기에 오이카와는 아는 사람이야?’라고 물었다. 그 물음에 켄마의 시선이 다시 비타에서 오이카와와 히나타에게, 아니, 정확히는 히나타에게로 돌아왔다. 대답을 신경 쓰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기도 전에 히나타의 활기찬 대답이 돌아왔다.


! 코즈메 켄마라고! 죽어가고 있는데 물을 뽑아줬고, 방금 친구가 됐어!”

……아닌데.”

아니라는데. 치비 짱. 혼자서 내적 친밀감만 쌓은 거 아냐?”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히나타를 내려다보자, 히나타는 딱 봐도 나는 풀이 죽었습니다. 라고 주장하는 듯이 어깨를 푹 늘어트리고 있었다. 둘이 함께 있던 시간은 30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저 소년이 그렇게까지 히나타의 마음에 들 수 있었던 걸까. 오이카와의 머릿속에 의문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히나타의 친화력이 굉장히 높다고 해도 저렇게 조용하고 소심한 것 같은 사람에게까지 일방적으로 저렇게 우리는 모두 친구! 라는 태도를 보일 만한 아이는 아니었다. 상대방이 어느 정도 받아주고, 히나타가 이 사람이라면 안전해, 라고 판단을 내려야지 그 친화력도 발휘할 수 있는 것인데.


아니, 예외는 있지.’


하나는 상대방이 배구를 한다는 것. 물론 배구를 한다고 해도 오이카와처럼 경계하는 상대는 많다. 하지만 저런 타입이라면 배구를 한다는 것만으로 혼자서 내적 친밀감을 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는-.


“-켄마!”


후자를 생각하기 직전, 누군가가 오이카와의 생각을 끊듯이 켄마의 이름을 외쳤다. 반대편 정류장에서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검은 머리를 세팅하고 있는 소년이었다. 입은 옷을 보아하니 켄마와 같은 운동부에 소속하고 있는 듯 한 그는, 벤치에 앉아 있는 켄마를 발견하자 겨우 찾았다. 라고 중얼거리며 씨익 웃었다.


야 이 바보야. 버스는 제대로 보고 타라고 했지!”

…………그건 미안해.”

너 말야. 너 찾느라 이번 시합에 못나갔다고? 좀 더 미안해하면 어때??”

어차피 쿠로는 못나가잖아. 선배들이 전부 주전자리 꿰차서.”

………….”


켄마의 말에 소년은 입을 닫았다. 뭔가 찔린 듯 한 표정이었지만, 곧 체념했다는 듯이 크게 한숨을 쉬고선 입을 열었다.


, 너 덕분에 그 망할 선배들의 뒤치다꺼리는 안해도 되지만... 그래도 너 때문에 난리 난 건 알지?”……버리고 가자고 하지 않았어? 선배들이.”

- 쿨럭쿨럭.”


대화를 하고 있는 도중에도 켄마는 단 한 번도 소년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애써 주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 그 모습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보고 있던 소년은 갑자기 쿨럭쿨럭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뛰어온 사람이다. 숨을 고르다가 중간에 침이라도 잘못 삼킨 것이겠지. 그 모습을 오이카와가 당황하고 보고 있는 와중에, 히나타가 다급하게 오이카와가 사다준 물을 그에게 내밀었다. 오이카와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아무리 박정하고 자기중심이라고 해도 물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대에게까지 박정하게 대할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자신이 열심히 뛰어가 사다준 물을 막 남에게 나누어주는 것에 대해 살짝, 아주 살짝 거슬렸지만 이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다. 문제가 있다면-.


, 고마워. 10.”

“-?”

“-?” 


히나타에게 물을 받았을 때 그가 말한 단어 한마디 정도일까. 현재 히나타는 10번이 아니다. 아니, 정확히는 아직 10번이 아니다라는 것이 정답이다. 아직 누군가와 연습시합조차 해보지 못한 조센지 배구 부는 아직 유니폼조차 받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그 상태의 히나타에게 ‘10이라고 한다면, ‘그건 다른 시간선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 , 미안. 아는 사람이랑 착각을.”

도마뱀 헤어씨?”


오이카와와 히나타가 이상한 목소리를 내자 그제서야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아챈 소년이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차, 히나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히나타의 입에서 나온 이상한 작명에 오이카와와 켄마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지만 소년만큼은 달랐다. 당혹한 표정이라면 당혹한 표정이지만, 당혹의 종류가 틀리다.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찾아냈을 때의 당혹한 표정이다.


…………10? 카라스노의?”

지금은 아니지만.”


그의 말을 반 정도 부정하며 히나타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자 소년은 잠시 기다려달라는 듯이 손바닥을 내밀고 다른 한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무리도 아니다. 그 모습을 보며 오이카와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현재의 그에게 공감하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무리도 아닐 것이다. 오이카와 자신도 분명히 자기 혼자만 이 세계에 떨어졌을 거라 생각하며 체념하고 있었던 때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자신과 똑같은 처지의 사람을, 그것도 자신이 잘 알고 있은 사람을 만났을 때의 쇼크는 꽤나 크다. 한 순간 사고가 한방에 날아가 버릴 정도니 말이다. 라며, 어느 샌가 오이카와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멘붕이 온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치비 짱.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상관은 없지만……. 근데 켄마 데리러 온 거죠? 괜찮아요?”

괜찮아.”


그 대답은 소년이 아닌 비타의 화면만을 바라보고 있던 켄마에게서 들려왔다. 그 대답에 소년이 봤지? 라는 듯이 이번엔 소년이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그런고로, 이야기 좀 하자. 저기서.”


소년이 가리킨 곳은 벤치에서 좀 떨어진 풀숲이 었다. 우리와 다르게 이 시간선의 주민인 켄마에게 이야기를 듣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저곳으로 선택했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저 곳으로 가면 히나타가 소년에게 돈을 뜯기게 될 것 만 같은 예감이 드는 것은. 히나타도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일까, 잔뜩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경계를 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보았지만 소년은 그런 히타나의 의견 따위 상관없다는 듯이 그의 뒷목을 잡고 상냥하게 웃었다.


우리가 대화가 필요한 건 사실이잖아? 안 그래? 치비 짱.”

, 그렇지만, 그렇지만 도마뱀 헤어 씨. 바쁘잖아요? 켄마 데리러 온 거 잖아요? 켄마가 괜찮다고 해도 지금 다들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니에요???”

아아, 진짜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시합은 시작했고, 2학년인 나한테는 차례 없다구? 나는 느긋하게 켄마만 데려가면 돼. 그치? 켄마? 우리 이야기 좀 하고 가도 되지?”

마음대로 해.”


켄마의 허락이 떨어지자 히나타의 얼굴은 새파래지고, 소년은 만면에 웃음을 띄웠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하자? 그렇게 말하며 소년은 히나타를 향해 씨익 웃어 보았다. 대화는 중요하다. 서로가 똑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은 방금 알았다. 하지만 제대로 대화를 나눠보기 전까지 속단할 수 없는 노릇이다. 소년이 히나타에게 대화를 해보자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 물론, 방법이 이상했지만 말이다.


잠깐만.” 

?” 


그래서일까. 오이카와의 머릿속에서 이 둘만 있게 하면 안 된다고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이대로 두 사람만 이야기하러 보내면 나중에 히나타가 울면서 돌아온다. 평소라면 히나타가 울건 말건 상관은 없지 않나, 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남자는 위험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위험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오이카와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오오, 치비 짱의 보호자신가?”


소년이 이빨을 드러내며 악당 같은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것을 발견해서인지, 아니면 성가신 것이 발견된 해서인지 알 수 없는 미소였지만 오이카와는 확신을 가졌다. 그래, 이거다. 분명히 이 미소 때문이다. 답지도 않게 히나타를 감싸게 된 것은. 이런 위험해 보이는 녀석만 아니었어도 자신은 관여하지 않은 채 버스를 기다리며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면 되었을 텐데. 왜 일이 이렇게 꼬이는 걸까. 내심 한숨을 쉬며 오이카와는 입을 열었다.


, 비슷한 거지. 우리 치비 짱을 괴롭히겠다는 의지가 이렇게나 확연히 보이는데 그냥 보내 줄 수 있을 리가.”

아니아니, 우리는 그냥 이야기만 하려는 거라고?”

네 태도와 얼굴을 보면 삥 뜯으러 가는 놈처럼 보이는데 그걸 믿으라고? 정 대화를 나누고 싶으면 나도 데려가면 어때?”

. 이건 치비 짱과 나만이 아는 비밀이야기라서 말야. 3자가 끼어드는 건 좀…….”


소년의 비밀을 강조하는 말에 오이카와가 눈썹을 찌푸렸다. 마치 나와 히나타는 이럴정도로 각별한 사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기에 더욱 더 불쾌했다. 네가 뭔데 우리 치비 짱을 그렇게 부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걸 막듯이 켄마의 어처구니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 너무 놀리지 말았어야지. 나라도 경계하게 된다고. 가만히 있어도 쿠로는 악당 같으니까.”

무슨 소리야 켄마. 나만큼 상냥한 사람이 어딨 다고 그래?”

상냥함이 다 얼어 죽었네. 아하하하하.”


뒤에서 후광을 뿜으며 소년이 최대한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반론을 해봤지만, 그 반론은 오이카와의 웃음소리가 섞인 말과 함께 와장창창 깨부숴져버렸다.


.”


오이카와의 지적에 히나타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곧 조용히 하라는 소년의 시선에 히나타는 동공을 부르르 떨며 마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주장하듯이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 어딜 봐서 상냥해. 소요가 불쌍하잖아.”

어이어이, 켄마. 너는 누구편이야?”

소요????’


투닥거리기 시작하는 켄마와 소년과 달리, 오이카와는 다른 단어에 반응해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소요. 머릿속으로 단어를 검색해보았지만 나오는 것은 히나타의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저 상황에서 소요라는 단어를 쓴다면 히나타의 이름밖에는 없다. 그 두 가지를 상출 해낸 오이카와의 머리는 개운해지기는 거녕 더욱 더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잠깐, 둘이 처음 만난 거 아냐? 게다가 쟤는 이 녀석처럼 우리처럼 표류자도 아닌데?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고 있는거야? 치비 짱이 친화력이 강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머릿속이 복잡하다. 만난 사람과 대부분 친해지는 능력을 지닌 히나타라고 해도 처음 만난 사람과 단시간에 이름을 부르게 만들 정도의 스킬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오이카와는 켄마와 히나타의 얼굴을 번갈아보더니,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어째서인지 기분이 좀 나빠졌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아무튼, 정말 삥이라도 뜯으면 곤란해지니까 나도 이야기에 끼어야겠어.”

아니아니, 곤란한데. 그거.”


계속 짓고 있던 악당의 표정이 불쾌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무리도 아닐 것이다. 죽고 나니 다른 시간선에서 눈을 떴다. 이런 소설에서나 나올 것 같은 미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자기도 이야기에 끼워 달라 하고 있으니 당연하다. 처음엔 태도가 불쾌해서 살짝 놀려줄 생각이었지만, 너무 놀리면 제대로 이야기에 끼워주지 않을 것 같았기에 오이카와는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입에 담았다.


나도 표류자야.”

“-!!!”


오이카와의 자백에 쿠로오의 눈동자가 작아졌다. 알수 없는 말을 했지만 분명히 오이카와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 증거로 쿠로오는 혼란스럽다는 얼굴로 아-. 하며 자신의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히나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의 말이 진짜냐고 묻는 눈빛이다. 그러자 히나타가 고개를 끄떡였고, 그 대답에 소년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다시 한 번 아-. 하며 한숨과 비슷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혼란스러운 것이다. 한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자신과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하니까. 갑자기 머리에 과부하가 왔는지 쿠로오가 계속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자, 그것에 불만을 가진 켄마가 한마디 했다.


쿠로. 시끄러.”

잠깐, 잠깐 봐줘. 이건 진짜 눈 감고 넘어가줘야 할 문제야 켄마. 지금 나 엄청 혼란스럽거든?”

그래그래. 조금 봐줘. 삼색 군. 지금 이 녀석의 머릿 속, 카오스일테니까?”

대왕님. 지금 즐기고 있지?”

설마


물론 거짓말이다. 그리고 히나타도 오이카와의 말 따위 믿고 있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내 머릿속은 혼돈과 혼란과 공포의 카오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라는 걸 똑똑히 보여주는 쿠로오가 재미있어 어쩔 수 없으니까.


아무튼 이걸로 나도 이야기에 껴도 되는 거지?”


그 모습을 좀 더 많이 관찰하고 싶었지만 버스가 올 시간을 생각하면 더 이상 이야기를 지체할 수 없었다. 활짝 웃는 얼굴로 오이카와가 묻자, 소년은 정말 싫은 것을 보는 표정으로 으으, 하고 읆조렸다.


, 성격 안 좋다는 말 많이 듣지?”

그럴 리가. 오이카와 씨는 상냥한 사람이라고?”


방금 전 소년이 했던 것처럼 등 뒤에 후광을 띄우며 최대한 상냥한 표정과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소년의 표정이 급속도로 썩어 들어갔다.


대왕님 성격 안 좋아요. 도마뱀 헤어 씨.”

쿠로같은 타입이네.”


옆에서 히나타와 켄마가 한마디씩 던졌지만 오이카와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그저 소년을 향해 생글생글 웃어보았다.


하아아. 이거 엄청난 강적을 만났나.”

그러니까 쿠로 같은 타입이라니까?”

켄마. 너어…….”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소년이 허탈하게 웃자, 다시 한 번 켄마의 팩트 폭력이 쿠로오를 계속해서 자기에게만 공격을 날리는 그에게 화를 낼 수 없었는지, 소년은 화를 꾹꾹 눌러참으며 계속 게임을 하고 있는 켄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켄마의 시선은 여전히 비타에 가 있었다. 그 모습에 잠깐 화가 울컥 치밀어오른 소년이었지만 능숙하게 화를 참으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포기했다, 라는 것 보다는 지친 것 같은 모습이었다.


, 일단 자기소개부터 할까? 도마뱀 군. 내 이름은 오이카와 토오루. 잘 부탁해.”


그가 제대로 진정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일까, 오이카와가 먼저 자기소개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정식으로 소개하는 것은 켄마가 없을 때 하면 될테니 이걸로 충분하다. 상대방에게 그 의도가 전해졌기 때문일까, 소년도 고개를 끄떡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쿠로오 테츠야. 앞으로 많이 연락을 주고 받게 될 것 같으니, 잘 부탁한다고?”


다시 한 번 악당 같은 미소를 띄우며 소년, 쿠로오 테츠야는 방금 전까지 짓고 있었던 지친 표정을 완벽히 지우며 씨익 웃었다.

 

* * *

 

나는 알다시피. 철골에 꽂혀서 죽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알다시피라고 하셔도 전 모르거든요? 운 나쁘게 지진 났을 때 공사 중인 건물 밑에라도 계셨어요?”


활짝 웃으며 자해와 비슷한 말을 하는 쿠로오를 어처구니없으면서도 공포 스러운 것을 보는 눈으로 두 사람이 바라보자, 쿠로오는 그저 씨익 웃어보였다. 그 웃음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무마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오이카와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뚱한 표정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현재 세 사람이 있는 곳은 처음에 쿠로오가 히나타를 데리고 가려고 했던 풀숲이었다. 이야기를 하자고 결론이 나자, 처음엔 켄마가 자리를 비켜주려고 했지만 쿠로오가 그냥 이 곳에서 이야기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당당하게 말하기엔 머리가 이상한 사람 취급당할 위험이 있다는 말에 히나타도 오이카와도 수긍하고선 그의 뒤를 따라서 이 곳에 온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지금 세 사람의 자세일까. 양쪽 무릎에 손을 올리고 쭈그려 앉거나. 아니면 쩍 벌린 채 쭈구려 앉아 있다던가. 여기에 담배만 쥐어주면 그냥 불량소년들이다. 그걸 인식한 오이카와는 한쪽 다리를 끓은 기사같은 자세로 앉았지만, 눈 앞의 두 사람이 너무나 거슬린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오이카와의 속내를 모른 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몰라?”

. 모르는데요. 역시 도마뱀 머리씨도 지진으로 그렇게 된 거에요?”

…………. 치비 짱.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말야. 일단 우리 호칭부터 바꿔보지 않을래? 갑자기 어감이 이상해졌다?”


계속해서 도마뱀 헤어 씨라고 하다가 게슈탈트 붕괴가 온 탓일까. 방금 전부터 히나타는 쿠로오를 도마뱀 머리 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어감이 도마뱀의 둔부 부분을 연상시키게 만들자 쿠로오는 급하게 스톱과 호칭을 바꿔달라는 의견을 냈고, 히나타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럼 쿠로 씨로라고 아무런 반발 없이 켄마가 쿠로오를 부르는 바꾸었다. 호칭에 대해서 별 집착이없다면 자신의 것도 바꿔주면 안되려나. 입 밖으로 내뱉기엔 어째서인지 졌다고 인정하는 것 같았기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지진? 갑자기 여기서 왜 지진이 나와? 내 사인은 철골에 관통당해서 죽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그 철골이 지진 때문이었어? 그런 거야?”

, 저에게 물으셔도 전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 혹시 그 후에 죽은 거야?”

……?”


-이야기가 맞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오이카와 뿐만이 아니었는지 쿠로오와 히나타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렇다면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상관은 없는 것이겠지. 다시 처음부터 확인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는지 쿠로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사고 날 때 켄마 옆에 있었잖아?”

?”

그러니까, 춘고 1일차 끝나고 돌아갈 때 우연히 만나서…….”

저는 합숙 이후로 쿠로 씨를 만난 적이 없는데요?”


서로의 말에 서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전국대회에서 히나타를 만났다는 쿠로오의 주장과 합숙이후로 쿠로오를 만나지 못했다는 히나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기에 더욱 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3자가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일단 진행을 위해서 한 가지 묻게 해줘. 도마뱀 군. ‘너는 언제 죽었어?’ ”


혼란스러운 두 사람이 이야기를 진행하게 만들면 이야기도 끝나지 못하고 버스가 올 것 같다고 생각하며 오이카와가 대화에 끼어들었지만, 쿠로오는 그런 그의 행동에 불만을 표하지 않은 채 오이카와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자신의 머릿속을 뒤지며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2017. 15. 아니, 4일인가? 방금 전에도 말했듯이 춘고 1일차 끝났을 때.”

…….”

……춘고?”


아마 그 쯤 일거야. 라는 부가설명을 들을 생각도 하지 못한 두 사람이 소리를 높였다. 두 사람이 죽은 날은 12. 쿠로오의 발언을 듣고 충격에 휩싸인 표정으로 오이카와와 히나타는 서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파란 얼굴에서 자신이 한 말은 그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충격을 안겨줬다는 것은 알겠는데, 둘이서 거짓말이지, 그럴 리가 없다. 라는 말만 계속 중얼거리고 있으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저기 말야. 슬슬 설명해줬으면 하는데? 계속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당한 채 시간만 보내기는 싫거든?”


살짝 공격적인 태도로 나가자 오이카와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자신들이 잘못한 것이 맞다. 하지만 그것과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것은 별개였는지 오이카와는 히나타에게 네가 설명하라는 듯 눈빛으로 지시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대화를 하는 것은 쿠로오와 히나타여만 했다. 3자인 자신은 두 사람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니까 가만히 있는 것이 베스트였다. 굳이 쿠로오의 말을 빌리자면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이 옳다. 오이카와가 꽤나 배배꼬여진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채, 히나타는 그가 시키는 대로 쿠로오에게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대왕님과 전. 201712일에 죽었거든요.”

………………?”


이번엔 쿠로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어갈 차례였다. 표정에서부터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라고 의문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것만 같은 얼굴로 히나타와 오이카와를 차례로 바라본 쿠로오는 다시 히나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일본어도 한국어도 중국어도,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계속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까닥이는 쿠로오의 말에 따르듯이 히나타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미야기 뿐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지역에서도 강한 지진이 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왕님과 저는 그 지진으로 인해 박살난 무언가 에게 깔려, 죽었어요.”


쿠로오와 달리 히나타는 아직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웃으며 말할 수 없는 모양인지 그의 표정은 말을 내뱉을수록 점점 딱딱해져갔다. 그 표정을 보면 역시 자신이 이야기하는 게 나았나, 살짝 후회가 들었지만 자신은 3자라며 오이카와는 후회를 꾹꾹 안으로 눌러 담았다. 아무리 처참한 죽음이었다 해도, 그걸 제 3자인 오이카와가 말하는 것은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쿠로오도 히나타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무언가에 대해선 더 이상 묻지 않은 채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지진?”

쿠로 씨도 그렇게 죽은 거 아니었나요?”

…………. 아니야. 지진의 전조 따위 없었어. 나는 갑자기 철골이 떨어져서 죽은 거였으니까. 게다가 그렇게 큰 지진이 일어났다면 봄고에도 영향이 있었겠지. . 지진은 없었어. 확실해.” 


자신이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몇 번이건 확인을 하며 쿠로오가 부정했다. 기억이란 것은 애매해서 남이 이렇게까지 밀어붙이면 그랬었던 걸까, 하고 착각하게 되는 법이 있다. 하지만 쿠로오는 애매한 기억속에서도 확실하게 아니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것은 애매해도 그것만큼은 확실해. 힘 있게 부정했지만 히나타는 그래도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은지 힘 없이 반론을 입에 담았다.


, 하지만

게다가 내가 죽을 때 치비 짱도 같이 있었어. 이건 확실해. 내 마지막 기억이 켄마랑 네가 나를 보며 경악하고 소리지르는 거였으니까.”


애써 웃으며 쿠로오가 결정타를 날렸다. 쿠로오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쿠로오를 처음 만나는 거지만, 그는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말 없이 쿠로오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으면, 옆에 앉아있던 히나타의 입에서 부들부들 떠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저는 대체 뭔데요. 아직도 죽을 때의 기억이 이렇게나 선명한데.”


그 말에 오이카와는 히나타를 부르려 했지만, 그의 얼굴에 띄워진 표정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혼란과 분노, 그리고 지금이라도 울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슬픈 감정이, 아니, 방금 오이카와가 알아챈 것보다 더 많은 좋지 않은 것들이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동안 히나타에게 이런 감정들은 없을 거라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분하다거나, 무언가를 싫어하거나 꺼려하는 부류의 감정은 있다. 직접 보았으니 그것들에 대한 부정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주변에서 쉽게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단순명쾌한 부류의 것들일 것 이라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당연하다. 히나타도 인간이다. 0이나 1로 이루어진 로봇이 아니다. 그러니 그가 이렇게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복잡하게 꼬인 감정을 갖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난 치비 짱의 무엇을 봐왔던 걸까.’


내심 자부하고 있었다. 자신은 이 세계에서 히나타의 유일한 동료이며, 시합에서 토스를 올려줄 수 있는 사람이며,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그래서일까. 오만하게도 자신은 히나타 소요를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망상하고 있던 자신이 창피해지는 순간이었다.


당장 도망가고 싶다.’


쥐구멍이 있다면 지금 당장 들어가고 싶을 정도다.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덮으며 고뇌하기 시작하기도 전에, 쿠로오의 목소리가 오이카와의 정신 줄을 제대로 잡아주려는 듯이 낮게 울려퍼졌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신만이 아는 일 아닐까?”

쿠로 씨.”


신이라니. 판타지세계도 아니고 그런 게 있을 리가. 재미없는 농담은 집어 치우라는 듯한 표정으로 두 사람이 쿠로오를 째려보자 쿠로오는 그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치비 짱. 마음은 알겠지만 나에게 화를 내도 소용없다고 생각하는데? 알고 있잖아. 내가 한 말이 맞을지도 모르고, 내가 이유라던가 원인 같은 걸 알려줄 수 없는 존재라는 것도.”

그건, 그렇지만.”


쿠로오는 오이카와와 히나타와 똑같은 처지다. 게다가 혼자라는 점에서 오이카와와 히나타보다 데메리트를 많이 받았다. 그런 그에게 이 상황은 대체 뭐냐고 묻는다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히나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묻지 않고서는, 따지지 않고서는 어쩔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건 잘 알아. 나도 혼란스럽고 말야. 하지만 우리 셋 중 이게 무슨 일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하고 싶었던 것, 목표로 하고 있던 것이 있었겠지. 그리고 겨우 손에 얻었나 싶었을 수도 있고, 스타트라인에 섰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 희망은 최악의 기억을 남기고 최악에 형태로 사라지고, 우리는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였지.”

………….”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유는 몰라. 그걸 말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그런데 말야. 이유란 거, 꼭 필요한 걸까?”


쿠로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오이카와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히나타도 마찬가지였는지 오이카와처럼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 두사람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푸훗, 하고 웃은 쿠로오는 다시한 번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서 크게 의문을 갖지 말자는거야. 확실히 만화나 소설 같은 공상의 이야기 같은 상황에 처해버렸지만 말야? 여기는 현실이잖아. 공상속의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세상을 구하거나 그러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적어도 이 3년간 나는 아주 평화롭게 지내왔고,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 그러니까,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하지 못했던 일을 하는데 집중을 해보는 건 어떨까?”

??” 

“3??”

쿠로 씨 3년이라는 건 무슨 의미에요???”

, 역시 그쪽에만 신경 쓰는구나. 너희.”


쿠로오의 의견보다 그 쪽이 더 신경 쓰였는지, 두 사람이 동공이 열린 눈으로 쿠로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정작 쿠로오는 이 반응을 예상했는지 그저 허허 웃으며 두 사람을 자신에게서 떼어놓았다.


말 그대로. 나는 3년 전에 여길 왔다……. 고하면 조금 이상한가. 아무튼 그런 거야.”

아니아니, 그런거야. 라고 말해도 납득도 이해도 잘 안 가는데!!.”

말했잖아? 그런 거 신경 쓰지 말라고. 애초에 이 현상이 뭣 때문에 일어났는지도 모르는데 일일이 신경 쓰면 피곤하잖아. 그래서 선배로써 후배들에게 조언을 하고 싶은데 말야.”


3년 먼저 이 곳에 왔다면 확실히 선배다. 하지만 태도가 저래서일까. 오이카와는 쿠로오에게 반감 이외의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쿠로오도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오이카와의 반응이 귀엽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치 너희들에게 거부권은 없다는 듯 한 태도였다.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이미 휘말려버렸고, 일은 일어나버렸어. 그리고 거기서 끝이야. 뒤에 뭔가 일어나겠지만 그건 공상의 주인공처럼 있을 수 없는 일에 휘말리는 건 아니라고 봐. 그러니까 이 일에 대한 의구심은 버리고, 하고 싶은걸 하자고. 기껏 얻은 제 2의 인생인데 나오지 않는 문제를 풀다가 연습 같은 걸 게을리 했다간 나중에 후회하는 건 너희들 아냐?”

연습은 제대로 하고 있는데? 혹시 도마뱀 군은 잡생각을 하느라 연습도 제대로 못했던 거야?”


쿠로오를 비웃으려는 듯이 오이카와가 크게 제스쳐를 취했다. 하지만 쿠로오도 오이카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편은 아니었다. 오이카와의 눈에 보이는 도발을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받아치며 카운터를 걸었다.


오오. 훌륭한데. 하지만 말야, 기억이란 것은 말야. -청나게 애매한거라서 말이지? 잊겠다고 생각해도, 잊고 있었다고 생각해도 갑자기, 전조도 없이 올라오는 경우도 있단 말이지. 만약 그것이 1점을 다루는 시합에서, 자신의 손에 모든 것이 달려있을 때 갑자기 떠오른다면? 그럴 때를 대비해서 얼른 털어버리는 게 낫지 않겠어?”

………….”


반박은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저 말에 이것저것 반박할 수 있는 말이 몇가지 머릿속에서 떠올랐지만, 그것들이 오이카와의 입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어째서인지 말들이 목구멍에 턱하고 막혀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사실에 오이카와가 입술을 깨물자, 쿠로오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마저 이야기를 이어갔다.


니들도 미련 하나나 두 개정도는 있을 거 아냐? 그걸 하는 데에 집중하자고.”


우시지마를 쓰러트리고 전국에 가고 싶다.

이번에야 말로 그 오렌지코트에 서고 싶다.


서로를 만났을 때에 두 사람은 자신의 소망을 밝혔다. 쿠로오가 말한 대로 예전의 미련을 여기서 풀자고, 오이카와도 히나타도 생각했기에 한 일이었다. 쿠로오의 여기서 미련을 풀자라는 말에는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히나타는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오이카와는 어쩌면 이번에도,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신에게 미움 받는 남자다. 오이카와를 미워했기에 신은 오이카와가 중학교 1학년 때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그의 앞에 데려다놓았고, 그가 중학교 3학년일 때에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뒤쫒게 만들었다. 분명히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거나, 아니면 단순히 신에게 미움받지 않았다면 이런 편성이 될 리는 없다고, 오이카와는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이유로 오이카와는 이라는 존재에 대해 불신간이 엄청났다. 물론 이 세계에서라도 우시지마를, 카게야마를 꺾어버리고 미련을 떨쳐내고 싶다고 생각은 하고 있긴 하지만, 쿠로오처럼 아무 일도 없을 거야라며 이 상황을 신의 선물처럼 생각할 수 없었다.


납득이 안가는 표정이네.”

난 너처럼 이 상황을 그다지 낙관적으로 볼 수 없어서 말야.”

흐음-? 그럼 계속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떨면서 지내겠다는 거야?”

……!”


이번에는 그냥 참을 수 없었는지 오이카와의 몸이 살짝 움직였다. 쿠로오의 멱살을 잡으려다가 관둔 듯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히나타는 그저 긴장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쿠로오는 정곡을 찔렀어?’라고 묻는 것 같은, 사람의 성질을 건들만한 미소로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탓일까. 오이카와는 자리에서 일어나 쿠로오를 노려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몇 초를 대치하고 있었을까,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쿠로. 2분후에 버스…….”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은 것을 감지했기 때문일까, 켄마는 하고 싶은 말을 전부 다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런 소꿉친구의 반응을 본 쿠로오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대왕님. 우리 켄마 괴롭히지 말아줄래? 저래 뵈도 꽤나 섬세한 애거든?”

오히려 쿠로가 괴롭히고 있었잖아.”


한눈에 상황을 파악했는지 켄마가 크게 한숨을 쉬며 쿠로오를 탓했다. 오이카와는 죽일 듯이 쿠로오를 노려보고 있고, 쿠로오는 그런 눈빛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그저 웃고만 있고, 가운데에 낀 히나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있다. 굳이 켄마가 아니더라도 쿠로오가 오이카와에게 시비를 걸었다는 것이 쉽게 추론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소꿉친구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혹은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본 켄마는,


아무튼 난 전했으니까


라는 한마디를 남긴 채 벤치로 돌아갔다. 그런 켄마를 사춘기가 온 아들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본 쿠로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아직도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오이카와의 어깨를 팡팡 쳤다.


, 어디까지나 내 의견이었으니 그렇게 날 세우지 말라고. 친구.”

누가 친구야.”


쿠로오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오이카와가 사납게 뱉어내보았지만 쿠로오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친구지. 아니면 동지라는 말이 좋아? 아님 동료?”


-어느 쪽도 싫어.


그렇게 말하고 싶다는 듯한 표정으로 오이카와가 쿠로오를 바라보았지만 정작 본인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아하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이런 이런. 미움 받아버렸나? 곤란한데?” 

전혀 곤란해 하지 않는 주제에.”

그렇지. 솔직히 난 치비 짱이랑만 연락을 취할 수 있으면 족하니까.”


거기에 또 긍정을 하자 오이카와는 순간 다시 살의가 들끓는 느낌을 받았다. 히나타의 지인이건 표류의 선배이건 지금은 상관없었다. 계속 웃고만 있는 저 면상을 한 대 때리고 싶다. 하지만 자신은 이성인이다. 그렇게 되뇌이며 오이카와가 어떻게든 마지막 이성을 붙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면, 그 사이에 쿠로오는 자신의 연락처를 쪽지에 적어서 히나타에게 건내고 있었다.


이거 내 연락처. 어차피 또 만나겠지만일단 갖고 있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


쿠로오의 말에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히나타가 다급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저기, 쿠로씨. !!!!”

“-쿠로!!”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저 멀리서 켄마의 버스가 왔으니 얼른 튀어와라라는 의미가 함축된 단어가 들려왔다. 그의 재촉섞인 외침에 쿠로오는 지금 가, 라고 대답하더니, 히나타와 오이카와의 어깨를 팡팡 치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친구들.”

저기, 저 못 만.”

미안. 나중에 문자로 줘! 나 간다!!”


시야에 버스가 보이자 쿠로오가 급하게 정류장 쪽으로 뛰어갔다. 버스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히나타도 더 이상 쿠로오를 부르지 않았다. 그 대신 쿠로오가 쥐어준 그의 연락처를 무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야했다. 살짝 후회가 섞인 옆모습에 오이카와는 방금 전까지 쿠로오에게 화가 났었다는 것을 뒤로 밀어뒀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할 말이라도 있었어?”

? ??? . , 괜찮아요. ”


어느새 히나타의 말투가 존댓말로 돌아가 있었지만, 여러모로 혼란스러웠으니까. 라면서 오이카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요하다면 지금 받은 연락처로 쿠로오에게 연락 할 테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겠지, 라고 자신에게 되내이며 오이카와는 벤치로 가자며 손짓했다.


으음, 실은 엄-청 신경 쓰이지만. 묻는 것도 좀 그렇지…….’


여태까지의 오이카와라면 나중에 이야기해주는 것을 기다리겠다고, 귀찮은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자기도 모르게 히나타에 대해 꽤나 관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역시 오랫동안 같이 있으면 정이 생기는구나. 이젠 될대로 되라라고 생각하며 오이카와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왕님. 방금 전의 이야기 어떻게 생각해요?”


벤치에 앉아서도 말 없이 연락처만 바라보던 히나타가 겨우 입을 떼었다. 그 사실에 내심 이 공기가 무겁다고 생각하던 오이카와는 이 무거운 분위기가 그제서야 깨졌구나, 라고 안도하며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확실히 그 놈의 지론은 맞아. 원인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지. 생각을 포기하고 예전에 하지 못했었던.. 미련을 없애는데에 집중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겠지. 하지만 말야, 나는 당해온 게 너무 많은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낙천적인 생각은 도저히 못하겠더라고. 오이카와 씨가 예전에 좀 많이 착하게 살았다고 해도 이렇게 나에게 유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나? 그런고로 좀 많이 신중해지자는 것이 오이카와 씨의 의견.”

헤에. 대왕님. 많이 꼬이셨네요.”

신중한 거라고 생각해줄래? 치비 짱?”


히나타 왈 마왕 미소를 지으며 오이카와가 빵실 웃었다. 그 이상 무슨 말을 했다가는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 라고 주장하는 듯 한 표정이었다. 그 기백에 밀린 탓 인지 히나타는 버릇처럼 죄송합니다, 라고 외쳤고, 오이카와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알았다면 됐어, 라고 팔짱을 끼며 피식 웃었다.


그러는 치비 짱은 어떤데?”

?”방금 전의 이야기, 어떻게 생각해?”

.저는-. , 버스.” 


히나타가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저 멀리서 두 사람이 탈 버스가 보였다. 30초 이내에 도착할 것만 같은 거리라는 것을 깨닫자 두 사람은 허둥지둥 짐을 챙겨 표지판 옆에 섰다. 타이밍이 좋은 것인지, 나쁜것인지. 오이카와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버스 문이 열리는 것을 기다리고 있으면, 뒤에 서 있던 히나타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오이카와의 귓가에 닿았다.


뭐어, 저는 어느 쪽이던 상관없지만요.”

?”


하지만 바람소리와 버스의 엔진소리 때문일까, 그 목소리는 제대로 오이카와의 귀에 닿지 못했다.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한 번 말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히나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오이카와보다 먼저 버스에 올라탔다. 그 뒷모습을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오이카와였지만, 곧 운전기사의 재촉에 정신을 차리고는 히나타를 따라 버스에 올라탔다.


, 나중에 물어보면 되겠지.’


멀미하기 전에 얼른 자버리라며 갖고 있던 안대를 씌워주며 오이카와는 문제를 나중으로 돌렸다. 어차피 기회는 앞으로도 많다.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며 오이카와는 히나타의 옆에 봉지와 물병을 두고선 자신도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Posted by 카멜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