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4. 03:09

5.

 

골든 위크 4일째. 오늘부터 조센지 배구부를 포함한 체육계 부 활동은 휴일에 들어간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체육관도 잠기게 되어 그 곳에서 배구를 하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평소라면 그 사실에 절망할 오이카와와 히나타였지만, 절망할 여유는 없었다. 두 사람에게는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있었으니까.


-이와이즈미를 만나러 간다.


그 자리의 공기에 휩쓸려서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실은 오이카와도 정말 이와이즈미를 만나고 싶었기에 그렇게 결정했다. 각오는 했다. 하지만 막상 D-day에 가까워질 때마다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히나타도 마찬가지였는지 시간이 지날 때마다 점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제안자가 그렇게 긴장하면 어쩌자는 거야. 반쯤 장난으로, 반쯤은 진심으로 그렇게 이야기해보아도 히나타의 긴장은 더욱 가속화할 뿐, 나아질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누군가가 자신보다 긴장하면 오히려 자신은 긴장하지 않는 법칙이 적용된 효과여서일까. 아니면 하도 긴장을 해서 마비가 되어버린 것일까. 어느 쪽의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오이카와는 긴장에서 꽤 벗어날 수 있었지만 문제는 히나타였다.

다행히 배구를 할 때나 이와이즈미를 만나러 간다라는 것을 잊고 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그 사실을 떠올리고 난 후에는 온 몸이 빳빳하게 굳어져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감독도 미사키도 다른 선배들도 히나타가 갑자기 긴장을 하기 시작하면 히나타를 걱정하거나, 오이카와에게 너 또 히나 짱 괴롭혔냐고 시비가 걸려오건 했다. 계속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리는 것도 한계였기에, 결국 치비 짱에게 공부를 가르쳐줬더니 이렇게 되버렸어요!!!’라고 자신이 들어도 어이가 없는 이유를 대버렸다.


이 말을 꺼냈을 때의 히나타의 경악한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 에요. 대왕님. 그런 설정 없었잖아요. 라며 뒤에서 히나타가 오이카와를 탓하는 표정으로 강렬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이제 와서 뻥이에요, 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이 변명은 꽤나 그럴 듯 했는지 모두가 그렇구나, 하고 납득해주었다. 오이카와도 히나타도 이렇게 쉽게 납득해줄 지는 몰랐는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 서있었지만, 두 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아나바라의 중간고사 기대하마라는 한마디와 격려가 담긴 토닥임을 받고서야 그제서야 오이카와는 심각성을 깨달았다. 히나타의 점수가 올라가지 않으면 자신의 책임이 된다. 그리서 선배들은 이렇게 말하겠지. ‘대왕님은 남을 가르치는 재능이 없구나-’라고. 프라이드가 높은 오이카와는 그것만큼은 싫었는지 그 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히나타의 공부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딴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 히나타의 긴장이 한동안 풀렸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이야기다.


그리고 D-day가 찾아왔다.


다시 히나타의 집으로 올 예정이었기에 오이카와는 간단한 짐을 들고 히나타와 함께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조센지에 입학한 뒤로 한 번도 돌아가지 않았던 집에 이런 형태로 돌아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상은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다. 라고 생각하며 오이카와가 한숨을 쉬었다. 히나타의 앞에선 가볍게 이야기 했지만, 실제로 오이카와는 배가 따끔따끔 아파올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히나타의 앞에서는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히나타처럼 고장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와이즈미는 자신을 만나줄까. 이야기를 들어줄까. 전 날에는 걱정과 시뮬레이션을 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 불안감을 지우려고 하는 행위가 오히려 더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오이카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진정하자, 진정해. 토오루.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잖아. 목적지까지 꽤 시간도 걸리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떻게 해.’


계속해서 주먹을 쥔 손에 식은땀이 흥건해지자, 오이카와는 그것을 얼버무리려는 듯이 계속해서 바지에 손을 벅벅 문지르는 일을 반복했다. 거기에 계속 목이 탔기에 계속해서 물을 마셔봤지만, 그걸로 갈증이 해소 되지 못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 까지 자는 게 좋겠지만, 긴장 때문에 잠이 오질 않는다. 요 근래 이렇게나 자신을 제대로 컨트롤 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던가. 정신도 16살 때로 돌아간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면, 갑자기 옆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욱.”


착각이 아니라면, 이 소리는 분명 뱃속에 들어있던 것이 목구멍으로 올라올 때 내는 소리다. 불길한 소리에 급히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그 곳에는 어느새 준비했는지 검은 봉다리에 얼굴을 박고 있는 히나타의 모습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내릴께요!!!”


상황이 긴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창피하다는 생각도 떨쳐버린 채 얼른 내리겠다는 버튼을 누르며, 오이카와가 소리쳤다. 이 순간만큼은 이와이즈미를 만나러간다는 생각을 지운 채 오이카와는 서둘러 히나타를 데리고 이름모를 정류장에 내렸다.

 


* * *

 


. 만 엔.”


자신의 지갑에 딱 한 장 들어있는 1만엔을 보고 오이카와는 자판기 앞에서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주머니를 뒤져도, 짐을 뒤져도, 히나타의 짐과 지갑을 뒤져도 1만 엔과 97엔 이상의 돈은 나오지 않았다. 둘이 합쳐 소지금 297. 큰 액수였지만 이걸로 눈 앞의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먹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1만엔 을 집어넣어보았지만 자판기는 친절하게도 1만 엔을 뱉었다, 다시 돌려주었다. 적어도 3엔만 더 있었다면 뭔가 살 수 있었을 텐데. 3엔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깨달은 오이카와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자판기와 벤치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중요한 물을 구입할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한 모금 정도는 남겨두는 건데.’


계속해서 목이 타는 바람에 비워버린 빈 패트 병에 화풀이를 하며 오이카와는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돌려보면 영혼까지 검은 봉다리에 토해 내버렸는지 탈진해 있는 히나타가 보였다. 얼른 물을 먹여줘야지 살아날 것 같은데, 지금 현 상황으로 그에게 수분을 섭취하게 해주는 것은 무리였다.


정말이지, 귀찮게 하네.’


원래부터 마음이 못 되어먹은 오이카와는 이 상황에서 자비롭게 아아, 괜찮아. 신경 쓰지 마라고 해줄 정도로 상냥한 위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환자에게 화를 쏟아낼 정도로 마음이 독하지는 못했다.


치비 짱, 이따가 두고 봐!!!!”


현재 오이카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 한마디만을 남기고 근처의 가게를 찾아 달리는 것 뿐이었다. 0 지도에 따르면 여기서부터 약 15분 거리에 작은 가게가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거기에 희망을 걸 수 밖에 없었다. 만약에 그 곳이 문을 닫았다면 또 15분을 달려서 전전 정거장에 있던 슈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만큼은 싫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오이카와는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결과, 오이카와는 두 정거장 전의 근처에 있는 슈퍼에 와 있었다. 오이카와의 예상대로 첫 가게는 문을 닫아있었고, 결국 오이카와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두 번째 정거장으로 뛰어갈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슈퍼는 문이 열려있었고, 오이카와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물과 드링크, 그리고 멀미약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 이거 버스가 더 빠른데...”


이 무거운 짐을 들고 30분가량을 달리는 것 보다 15분을 더 기다려서 버스를 타고 그 정류장으로 가는 것이 더 빨랐다. 왜 이렇게 애매한 시간인 걸까. 버스정류장에 붙어있는 시간표를 노려보며 오이카와는 잠시 고민하더니, 곧 크게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열었다.


뛰어가도 버스가 치비 짱이 있는 곳에 먼저 도착할 것 같고 말야.”


그러니까 이 선택은 어쩔 수 없다. 절대 절대 자신이 매정해서 얼른 히나타에게 가지 않고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이게 가장 합리적이고 체력을 아끼는 길이다. 마음 속 어디선가에서 현재의 자신에게 매정한 것이 아니냐고 손가락질을 하는 또 다른 자신에게 변명을 하듯이 머릿속으로 변명에 비슷한 생각을 떠올리며, 오이카와는 히나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오…….”]


얼마간의 통화음이 울렸을까. 평소와 달리 기운이 없는 목소리의 히나타의 목소리가 스피커너머에서 들려왔다.


치비 짱, 오이카와 씨인데, 괜찮아? 몸은 좀 어때?”

[“괜찮아요오. 물도 마셨고, 조금 쉬면, 괜찮아질지도.”]

얻어 마셔? 옆에 누구 있어?” 


방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두 사람의 수중에 음료수를 살 수 있는 동전과 지폐는 없었다. 그렇기에 히나타가 자력으로 음료수를 사서 마셨을 리 없다. 그렇다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는 결론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런 곳에 내리는 이상한 사람도 다 있네.’


오이카와와 히나타가 내린 그 곳은 이 곳이 정말 정류장인가, 라고 할 정도로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장소였다. 아니, 자판기와 벤치는 있으니 아무것도 없다는 표현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곳에 사람이 있다니, 그 사실이 왠지 께림직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거긴 정류장이라고. 토오루. 누가 있어도 이상하진 않잖아.’


순간 범죄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이상한 가정을 고개를 털어 없앤 오이카와는 목 언저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일단 다행이네. 실은 뛰어가는 것보다 버스타고 가는 게 더 빨리 도착할 것 같거든? 오이카와 씨가 올때까지 착하게 있을 수 있어-?”

[“, ! 아니아니. ! 버스타고 와! 짐 지키면서 기다리고 있을게!”]


스피커 너머에서 히나타가 힘없이 웃는 것이 들려왔다. 말을 걸어도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던 처음과 비교하면 그나마 괜찮아진 편이지만, 그래도 평소와 비교한다면 힘이 없다는 것은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그걸 생각하니 지금 당장 그의 곁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체력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이득이라고 되뇌이며 오이카와는 표지판에 붙어있는 시간표를 바라보다가, 근처의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 보니 혼자가 된 건 진짜 오랜만이네.’


골든 위크에 돌입한 이후로 계속 히나타의 집과 학교만을 오가고 있었기 때문일까, 오이카와의 혼자만의 시간은 화장실과 샤워를 하는 시간 외에는 없었다. 오랜만에 의도치 않게 혼자만의 시간을 얻었지만, 그리 즐겁지 않은 건 분명히 히나타가 마음에 걸려서다. 그 사실에 짜증이 난 오이카와는 애꿎은 돌맹이만을 차 보았지만 마음속에 생긴 응어리는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전부 치비 짱 때문이야.’


그가 멀미로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안절부절 하고 걱정되는 마음으로 버스를 기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크게 한숨을 쉬었다.


더 이상 치비 짱이 민폐라고 생각하는 건 관두자. 제발. ’


확실히 히나타는 일을 키우는 타입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 민폐라는 것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숨을 쉴 수 있게 해주었다. 그가 끌어내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오이카와는 아직까지도 모든 것을 보지 못한 척을 하며 도망다니다가 마지막엔 망가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치비 짱에게 감사해야해.’


히나타에게는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가 있었기에 오이카와는 조센지라는 들어보지도 못한 학교생활에 녹아내릴 수 있었고, 새로이 다시 시작해보자고 다짐도 할 수 있었던 데다가, 이렇게 이와이즈미와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그와 제대로 마주하려 움직일 수 있었다. 만약 히나타는 표류동료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분명 오이카와는 지금처럼 여유와 편안함을 가질 수 없었을 테고, 이와이즈미에게서 계속 도망 다니고 있었음이 틀림없다라고 오이카와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실망했다. 언제나 자신이 바보 같은 짓을 하면 엉덩이를 걷어 차주고, 잔소리를 하고, 이끌어주고, 믿어주었던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이곳의 그는 오이카와가 알던 이와이즈미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든 것은 이 곳의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상냥한 말은 물론 욕도, 자신의 바보 같은 행동과 발언에 태클도 걸어주지 않는데다 잔소리도 해주지 않았다. 그가 오이카와를 포기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완전히 혼자가 되어버렸다. 그 사실에 절망하고 있는 오이카와를 히나타는 손을 잡고 여기까지 끌어주었다. 오이카와가 계속 툴툴거리고 고압적인 태도를 보여도 히나타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끌어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감사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않는가. 문제는 자신이 그 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청개구리처럼 그에게 화만 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 매일매일 다짐은 하지만, 언제나 마지막은 자기혐오와 반성으로 끝나버린다.


분명 이유는 그거겠지. 내가 치비 짱을 자신과 똑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거.’


이 시간 축에 표류해 온 시점에서 오이카와도 히나타도 별 다르지 않다. 오이카와가 원래는 히나타 보다 2살 가량 많다 해도, 여기서는 똑같이 1학년이고, 원래 갖고 있던 스텟도 어느 정도 깎인 상태였다. 토스 실력, 체력, 리시브 솜씨, 점프의 높이. 전부 3학년의 오이카와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런 주제에 자존심만은 3학년의 자신 그대로였기에 오이카와는 무의식적으로 히나타를 자신보다 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치비 짱만이 아냐. 나도 생각을 바꿔야해.’


생각이나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머리를 세게 쳐 기억이라도 잃지 않는 한 이 빌어먹을 생각과 사고방식이 바뀌는 일은 없을 테지. 그러니 이 나쁜 점이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다.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을 고개 들어 바라보았다. 느긋한 광경에 방금 전까지 바빴던 일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아니까.’


노력하지 않고서 결정짓는 것은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기에 지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는 오이카와는 포기할 생각은 추오도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머릿속에 제일 먼저 클리어 해야 할 난관을 떠올리며 오이카와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 버스가 오고 있다는 것을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오이카와는 100엔과 정기권을 꺼내들고서는, 자신 앞에 정차해달라고 말하듯이 크게 손을 흔들었다.

 

* * *

 

어디학교-”


버스에서 내리면, 기다렸다는 듯이 히나타가 자신에게 뛰어오거나, 적어도 대왕님이라고 큰 목소리로 외칠거라 멋대로 생각했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런 오이카와의 예상을 깨듯이 처음 들려온 것은 대왕님이라는 히나타의 목소리가 아닌, 3자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삼색 고양이였다. 귀찮았는지, 아니면 일부러 그렇게 하려는 것인지 그는 금발로 염색한 주제에 뿌리 염색을 하지 않은 채 방치해놓고 있었다. 거기다 눈매까지 고양이를 닮은 탓일까, 검정색과 노란색, 그리고 어울리지 않지만 빨간색. 이렇게 3색이 섞인 고양이로 보였다. 하얀색, 노란색, 붉은색. 보통 붉은색이 들어가야 할 장소에 하얀색이 들어가지만 오이카와가 굳이 붉은 색을 넣은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입고 있는 운동복이 상의도 하의도 눈이 아플 정도는 아니지만 눈에 확 들어오는 빨간색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 누구?’


방금 전 통화 내용을 떠올려보면 아마도 이 소년이 히나타에게 물을 준 사람일지도 모른다. 소년을 바라보며 머릿속에서 이것저것 추측하고 있으면, 오이카와의 시선을 피하듯이 소년이 몸을 움츠렸다. 여전히 시선은 손에 들려있는 비타에 가 있었지만 딱 봐도 나는 당신의 시선이 불편해요라고 말 없이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면 자신이 소년을 괴롭히고 있는 걸로 보이지 않는가. 불쾌하다는 듯이 오이카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자, 그 모습을 발견한 히나타가 그 모습을 지적하며 목소리를 높혔다.


아아!! 대왕님이 켄마 괴롭히고 있어!!!”

, 아니야! 치비 짱! 오이카와 씨는 누군가 하고 궁금해서 본 것 뿐이야!!!”


정말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오이카와가 반론했다. 자신은 그저 그가 히나타가 말한 사람인가, 하고 본 것뿐이었는데. -라고, 본인은 생각하고 있지만 3자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오이카와는 켄마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있다라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문제는 오이카와가 그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두 사람은 뚱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튼 치비 짱, 해야 할 말은?”


약과 드링크가 든 봉지를 들어 올리며 오이카와가 살짝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너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했다. 라고 생색을 낼 생각은 아니었지만 오이카와가 온 것을 기뻐하는 것 보다 생판 모르는 남을 먼저 챙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오이카와는 유치한 수법을 썼다. 부스럭, 거리며 눈앞에 나타난 비닐봉지를 죄악감 넘치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히나타는 곧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알면 됐어 알면. 옛다.”


오이카와가 봉지를 내밀자 히나타는 최대한 고개를 숙이며 그 봉지를 받았다. 너무 생색을 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도 했지만 나쁜 것은 히나타며,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이정도 해도 괜찮다며 속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자신이 고생하는 사이에 제 3자가 나타나 상황을 파파밧, 정리해버렸다. 그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히나타는 켄마의 편만을 들고, 덕분에 오이카와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현재 히나타와 동갑이라고 해도 정신연령은 그보다 위다. 그러니까 좀 더 어른스럽게 대처하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막상 결과는 이 꼴이다. 크게 한숨을 쉬며 오이카와는 봉지의 내용물을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있었다.


일단 더 가야하니까 약은 한 번 더 먹어두고. 물은 아까 전에 먹었다고 했지? 화장실이 급해지면 곤란하니까 적당히 먹고.”

그런 것 치곤 물이나 스포츠 드링크가 많은 것 같은…….”

물은 많이 있어도 괜찮다구? 또 물 없어서 중간에 내리게 되면 곤란하고 말야.” 

, 고맙습. 아니, 고마워.”


오이카와의 설명에 따라 유리병에 담겨있는 멀미약을 마시는 히나타를 잠시 바라본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켄마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이카와와 눈이 마주치자 켄마는 살짝 움찔하더니 다시 시선을 비타로 돌렸다. 그러니까 괴롭힐 생각은 추호도 없다니까.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며 오이카와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저 애가 도와준 애? 아는 사람이야?”


방금 전부터 히나타는 그를 켄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켄마라는 단어는 성보다 이름이라고 생각했기에 오이카와는 아는 사람이야?’라고 물었다. 그 물음에 켄마의 시선이 다시 비타에서 오이카와와 히나타에게, 아니, 정확히는 히나타에게로 돌아왔다. 대답을 신경 쓰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기도 전에 히나타의 활기찬 대답이 돌아왔다.


! 코즈메 켄마라고! 죽어가고 있는데 물을 뽑아줬고, 방금 친구가 됐어!”

……아닌데.”

아니라는데. 치비 짱. 혼자서 내적 친밀감만 쌓은 거 아냐?”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히나타를 내려다보자, 히나타는 딱 봐도 나는 풀이 죽었습니다. 라고 주장하는 듯이 어깨를 푹 늘어트리고 있었다. 둘이 함께 있던 시간은 30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저 소년이 그렇게까지 히나타의 마음에 들 수 있었던 걸까. 오이카와의 머릿속에 의문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히나타의 친화력이 굉장히 높다고 해도 저렇게 조용하고 소심한 것 같은 사람에게까지 일방적으로 저렇게 우리는 모두 친구! 라는 태도를 보일 만한 아이는 아니었다. 상대방이 어느 정도 받아주고, 히나타가 이 사람이라면 안전해, 라고 판단을 내려야지 그 친화력도 발휘할 수 있는 것인데.


아니, 예외는 있지.’


하나는 상대방이 배구를 한다는 것. 물론 배구를 한다고 해도 오이카와처럼 경계하는 상대는 많다. 하지만 저런 타입이라면 배구를 한다는 것만으로 혼자서 내적 친밀감을 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는-.


“-켄마!”


후자를 생각하기 직전, 누군가가 오이카와의 생각을 끊듯이 켄마의 이름을 외쳤다. 반대편 정류장에서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검은 머리를 세팅하고 있는 소년이었다. 입은 옷을 보아하니 켄마와 같은 운동부에 소속하고 있는 듯 한 그는, 벤치에 앉아 있는 켄마를 발견하자 겨우 찾았다. 라고 중얼거리며 씨익 웃었다.


야 이 바보야. 버스는 제대로 보고 타라고 했지!”

…………그건 미안해.”

너 말야. 너 찾느라 이번 시합에 못나갔다고? 좀 더 미안해하면 어때??”

어차피 쿠로는 못나가잖아. 선배들이 전부 주전자리 꿰차서.”

………….”


켄마의 말에 소년은 입을 닫았다. 뭔가 찔린 듯 한 표정이었지만, 곧 체념했다는 듯이 크게 한숨을 쉬고선 입을 열었다.


, 너 덕분에 그 망할 선배들의 뒤치다꺼리는 안해도 되지만... 그래도 너 때문에 난리 난 건 알지?”……버리고 가자고 하지 않았어? 선배들이.”

- 쿨럭쿨럭.”


대화를 하고 있는 도중에도 켄마는 단 한 번도 소년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애써 주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 그 모습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보고 있던 소년은 갑자기 쿨럭쿨럭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뛰어온 사람이다. 숨을 고르다가 중간에 침이라도 잘못 삼킨 것이겠지. 그 모습을 오이카와가 당황하고 보고 있는 와중에, 히나타가 다급하게 오이카와가 사다준 물을 그에게 내밀었다. 오이카와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아무리 박정하고 자기중심이라고 해도 물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대에게까지 박정하게 대할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자신이 열심히 뛰어가 사다준 물을 막 남에게 나누어주는 것에 대해 살짝, 아주 살짝 거슬렸지만 이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다. 문제가 있다면-.


, 고마워. 10.”

“-?”

“-?” 


히나타에게 물을 받았을 때 그가 말한 단어 한마디 정도일까. 현재 히나타는 10번이 아니다. 아니, 정확히는 아직 10번이 아니다라는 것이 정답이다. 아직 누군가와 연습시합조차 해보지 못한 조센지 배구 부는 아직 유니폼조차 받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그 상태의 히나타에게 ‘10이라고 한다면, ‘그건 다른 시간선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 , 미안. 아는 사람이랑 착각을.”

도마뱀 헤어씨?”


오이카와와 히나타가 이상한 목소리를 내자 그제서야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아챈 소년이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차, 히나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히나타의 입에서 나온 이상한 작명에 오이카와와 켄마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지만 소년만큼은 달랐다. 당혹한 표정이라면 당혹한 표정이지만, 당혹의 종류가 틀리다.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찾아냈을 때의 당혹한 표정이다.


…………10? 카라스노의?”

지금은 아니지만.”


그의 말을 반 정도 부정하며 히나타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자 소년은 잠시 기다려달라는 듯이 손바닥을 내밀고 다른 한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무리도 아니다. 그 모습을 보며 오이카와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현재의 그에게 공감하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무리도 아닐 것이다. 오이카와 자신도 분명히 자기 혼자만 이 세계에 떨어졌을 거라 생각하며 체념하고 있었던 때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자신과 똑같은 처지의 사람을, 그것도 자신이 잘 알고 있은 사람을 만났을 때의 쇼크는 꽤나 크다. 한 순간 사고가 한방에 날아가 버릴 정도니 말이다. 라며, 어느 샌가 오이카와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멘붕이 온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치비 짱.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상관은 없지만……. 근데 켄마 데리러 온 거죠? 괜찮아요?”

괜찮아.”


그 대답은 소년이 아닌 비타의 화면만을 바라보고 있던 켄마에게서 들려왔다. 그 대답에 소년이 봤지? 라는 듯이 이번엔 소년이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그런고로, 이야기 좀 하자. 저기서.”


소년이 가리킨 곳은 벤치에서 좀 떨어진 풀숲이 었다. 우리와 다르게 이 시간선의 주민인 켄마에게 이야기를 듣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저곳으로 선택했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저 곳으로 가면 히나타가 소년에게 돈을 뜯기게 될 것 만 같은 예감이 드는 것은. 히나타도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일까, 잔뜩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경계를 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보았지만 소년은 그런 히타나의 의견 따위 상관없다는 듯이 그의 뒷목을 잡고 상냥하게 웃었다.


우리가 대화가 필요한 건 사실이잖아? 안 그래? 치비 짱.”

, 그렇지만, 그렇지만 도마뱀 헤어 씨. 바쁘잖아요? 켄마 데리러 온 거 잖아요? 켄마가 괜찮다고 해도 지금 다들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니에요???”

아아, 진짜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시합은 시작했고, 2학년인 나한테는 차례 없다구? 나는 느긋하게 켄마만 데려가면 돼. 그치? 켄마? 우리 이야기 좀 하고 가도 되지?”

마음대로 해.”


켄마의 허락이 떨어지자 히나타의 얼굴은 새파래지고, 소년은 만면에 웃음을 띄웠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하자? 그렇게 말하며 소년은 히나타를 향해 씨익 웃어 보았다. 대화는 중요하다. 서로가 똑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은 방금 알았다. 하지만 제대로 대화를 나눠보기 전까지 속단할 수 없는 노릇이다. 소년이 히나타에게 대화를 해보자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 물론, 방법이 이상했지만 말이다.


잠깐만.” 

?” 


그래서일까. 오이카와의 머릿속에서 이 둘만 있게 하면 안 된다고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이대로 두 사람만 이야기하러 보내면 나중에 히나타가 울면서 돌아온다. 평소라면 히나타가 울건 말건 상관은 없지 않나, 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남자는 위험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위험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오이카와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오오, 치비 짱의 보호자신가?”


소년이 이빨을 드러내며 악당 같은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것을 발견해서인지, 아니면 성가신 것이 발견된 해서인지 알 수 없는 미소였지만 오이카와는 확신을 가졌다. 그래, 이거다. 분명히 이 미소 때문이다. 답지도 않게 히나타를 감싸게 된 것은. 이런 위험해 보이는 녀석만 아니었어도 자신은 관여하지 않은 채 버스를 기다리며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면 되었을 텐데. 왜 일이 이렇게 꼬이는 걸까. 내심 한숨을 쉬며 오이카와는 입을 열었다.


, 비슷한 거지. 우리 치비 짱을 괴롭히겠다는 의지가 이렇게나 확연히 보이는데 그냥 보내 줄 수 있을 리가.”

아니아니, 우리는 그냥 이야기만 하려는 거라고?”

네 태도와 얼굴을 보면 삥 뜯으러 가는 놈처럼 보이는데 그걸 믿으라고? 정 대화를 나누고 싶으면 나도 데려가면 어때?”

. 이건 치비 짱과 나만이 아는 비밀이야기라서 말야. 3자가 끼어드는 건 좀…….”


소년의 비밀을 강조하는 말에 오이카와가 눈썹을 찌푸렸다. 마치 나와 히나타는 이럴정도로 각별한 사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기에 더욱 더 불쾌했다. 네가 뭔데 우리 치비 짱을 그렇게 부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걸 막듯이 켄마의 어처구니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 너무 놀리지 말았어야지. 나라도 경계하게 된다고. 가만히 있어도 쿠로는 악당 같으니까.”

무슨 소리야 켄마. 나만큼 상냥한 사람이 어딨 다고 그래?”

상냥함이 다 얼어 죽었네. 아하하하하.”


뒤에서 후광을 뿜으며 소년이 최대한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반론을 해봤지만, 그 반론은 오이카와의 웃음소리가 섞인 말과 함께 와장창창 깨부숴져버렸다.


.”


오이카와의 지적에 히나타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곧 조용히 하라는 소년의 시선에 히나타는 동공을 부르르 떨며 마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주장하듯이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 어딜 봐서 상냥해. 소요가 불쌍하잖아.”

어이어이, 켄마. 너는 누구편이야?”

소요????’


투닥거리기 시작하는 켄마와 소년과 달리, 오이카와는 다른 단어에 반응해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소요. 머릿속으로 단어를 검색해보았지만 나오는 것은 히나타의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저 상황에서 소요라는 단어를 쓴다면 히나타의 이름밖에는 없다. 그 두 가지를 상출 해낸 오이카와의 머리는 개운해지기는 거녕 더욱 더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잠깐, 둘이 처음 만난 거 아냐? 게다가 쟤는 이 녀석처럼 우리처럼 표류자도 아닌데?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고 있는거야? 치비 짱이 친화력이 강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머릿속이 복잡하다. 만난 사람과 대부분 친해지는 능력을 지닌 히나타라고 해도 처음 만난 사람과 단시간에 이름을 부르게 만들 정도의 스킬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오이카와는 켄마와 히나타의 얼굴을 번갈아보더니,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어째서인지 기분이 좀 나빠졌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아무튼, 정말 삥이라도 뜯으면 곤란해지니까 나도 이야기에 끼어야겠어.”

아니아니, 곤란한데. 그거.”


계속 짓고 있던 악당의 표정이 불쾌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무리도 아닐 것이다. 죽고 나니 다른 시간선에서 눈을 떴다. 이런 소설에서나 나올 것 같은 미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자기도 이야기에 끼워 달라 하고 있으니 당연하다. 처음엔 태도가 불쾌해서 살짝 놀려줄 생각이었지만, 너무 놀리면 제대로 이야기에 끼워주지 않을 것 같았기에 오이카와는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입에 담았다.


나도 표류자야.”

“-!!!”


오이카와의 자백에 쿠로오의 눈동자가 작아졌다. 알수 없는 말을 했지만 분명히 오이카와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 증거로 쿠로오는 혼란스럽다는 얼굴로 아-. 하며 자신의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히나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의 말이 진짜냐고 묻는 눈빛이다. 그러자 히나타가 고개를 끄떡였고, 그 대답에 소년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다시 한 번 아-. 하며 한숨과 비슷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혼란스러운 것이다. 한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자신과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하니까. 갑자기 머리에 과부하가 왔는지 쿠로오가 계속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자, 그것에 불만을 가진 켄마가 한마디 했다.


쿠로. 시끄러.”

잠깐, 잠깐 봐줘. 이건 진짜 눈 감고 넘어가줘야 할 문제야 켄마. 지금 나 엄청 혼란스럽거든?”

그래그래. 조금 봐줘. 삼색 군. 지금 이 녀석의 머릿 속, 카오스일테니까?”

대왕님. 지금 즐기고 있지?”

설마


물론 거짓말이다. 그리고 히나타도 오이카와의 말 따위 믿고 있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내 머릿속은 혼돈과 혼란과 공포의 카오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라는 걸 똑똑히 보여주는 쿠로오가 재미있어 어쩔 수 없으니까.


아무튼 이걸로 나도 이야기에 껴도 되는 거지?”


그 모습을 좀 더 많이 관찰하고 싶었지만 버스가 올 시간을 생각하면 더 이상 이야기를 지체할 수 없었다. 활짝 웃는 얼굴로 오이카와가 묻자, 소년은 정말 싫은 것을 보는 표정으로 으으, 하고 읆조렸다.


, 성격 안 좋다는 말 많이 듣지?”

그럴 리가. 오이카와 씨는 상냥한 사람이라고?”


방금 전 소년이 했던 것처럼 등 뒤에 후광을 띄우며 최대한 상냥한 표정과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소년의 표정이 급속도로 썩어 들어갔다.


대왕님 성격 안 좋아요. 도마뱀 헤어 씨.”

쿠로같은 타입이네.”


옆에서 히나타와 켄마가 한마디씩 던졌지만 오이카와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그저 소년을 향해 생글생글 웃어보았다.


하아아. 이거 엄청난 강적을 만났나.”

그러니까 쿠로 같은 타입이라니까?”

켄마. 너어…….”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소년이 허탈하게 웃자, 다시 한 번 켄마의 팩트 폭력이 쿠로오를 계속해서 자기에게만 공격을 날리는 그에게 화를 낼 수 없었는지, 소년은 화를 꾹꾹 눌러참으며 계속 게임을 하고 있는 켄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켄마의 시선은 여전히 비타에 가 있었다. 그 모습에 잠깐 화가 울컥 치밀어오른 소년이었지만 능숙하게 화를 참으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포기했다, 라는 것 보다는 지친 것 같은 모습이었다.


, 일단 자기소개부터 할까? 도마뱀 군. 내 이름은 오이카와 토오루. 잘 부탁해.”


그가 제대로 진정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일까, 오이카와가 먼저 자기소개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정식으로 소개하는 것은 켄마가 없을 때 하면 될테니 이걸로 충분하다. 상대방에게 그 의도가 전해졌기 때문일까, 소년도 고개를 끄떡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쿠로오 테츠야. 앞으로 많이 연락을 주고 받게 될 것 같으니, 잘 부탁한다고?”


다시 한 번 악당 같은 미소를 띄우며 소년, 쿠로오 테츠야는 방금 전까지 짓고 있었던 지친 표정을 완벽히 지우며 씨익 웃었다.

 

* * *

 

나는 알다시피. 철골에 꽂혀서 죽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알다시피라고 하셔도 전 모르거든요? 운 나쁘게 지진 났을 때 공사 중인 건물 밑에라도 계셨어요?”


활짝 웃으며 자해와 비슷한 말을 하는 쿠로오를 어처구니없으면서도 공포 스러운 것을 보는 눈으로 두 사람이 바라보자, 쿠로오는 그저 씨익 웃어보였다. 그 웃음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무마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오이카와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뚱한 표정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현재 세 사람이 있는 곳은 처음에 쿠로오가 히나타를 데리고 가려고 했던 풀숲이었다. 이야기를 하자고 결론이 나자, 처음엔 켄마가 자리를 비켜주려고 했지만 쿠로오가 그냥 이 곳에서 이야기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당당하게 말하기엔 머리가 이상한 사람 취급당할 위험이 있다는 말에 히나타도 오이카와도 수긍하고선 그의 뒤를 따라서 이 곳에 온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지금 세 사람의 자세일까. 양쪽 무릎에 손을 올리고 쭈그려 앉거나. 아니면 쩍 벌린 채 쭈구려 앉아 있다던가. 여기에 담배만 쥐어주면 그냥 불량소년들이다. 그걸 인식한 오이카와는 한쪽 다리를 끓은 기사같은 자세로 앉았지만, 눈 앞의 두 사람이 너무나 거슬린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오이카와의 속내를 모른 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몰라?”

. 모르는데요. 역시 도마뱀 머리씨도 지진으로 그렇게 된 거에요?”

…………. 치비 짱.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말야. 일단 우리 호칭부터 바꿔보지 않을래? 갑자기 어감이 이상해졌다?”


계속해서 도마뱀 헤어 씨라고 하다가 게슈탈트 붕괴가 온 탓일까. 방금 전부터 히나타는 쿠로오를 도마뱀 머리 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어감이 도마뱀의 둔부 부분을 연상시키게 만들자 쿠로오는 급하게 스톱과 호칭을 바꿔달라는 의견을 냈고, 히나타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럼 쿠로 씨로라고 아무런 반발 없이 켄마가 쿠로오를 부르는 바꾸었다. 호칭에 대해서 별 집착이없다면 자신의 것도 바꿔주면 안되려나. 입 밖으로 내뱉기엔 어째서인지 졌다고 인정하는 것 같았기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지진? 갑자기 여기서 왜 지진이 나와? 내 사인은 철골에 관통당해서 죽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그 철골이 지진 때문이었어? 그런 거야?”

, 저에게 물으셔도 전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 혹시 그 후에 죽은 거야?”

……?”


-이야기가 맞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오이카와 뿐만이 아니었는지 쿠로오와 히나타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렇다면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상관은 없는 것이겠지. 다시 처음부터 확인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는지 쿠로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사고 날 때 켄마 옆에 있었잖아?”

?”

그러니까, 춘고 1일차 끝나고 돌아갈 때 우연히 만나서…….”

저는 합숙 이후로 쿠로 씨를 만난 적이 없는데요?”


서로의 말에 서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전국대회에서 히나타를 만났다는 쿠로오의 주장과 합숙이후로 쿠로오를 만나지 못했다는 히나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기에 더욱 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3자가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일단 진행을 위해서 한 가지 묻게 해줘. 도마뱀 군. ‘너는 언제 죽었어?’ ”


혼란스러운 두 사람이 이야기를 진행하게 만들면 이야기도 끝나지 못하고 버스가 올 것 같다고 생각하며 오이카와가 대화에 끼어들었지만, 쿠로오는 그런 그의 행동에 불만을 표하지 않은 채 오이카와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자신의 머릿속을 뒤지며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2017. 15. 아니, 4일인가? 방금 전에도 말했듯이 춘고 1일차 끝났을 때.”

…….”

……춘고?”


아마 그 쯤 일거야. 라는 부가설명을 들을 생각도 하지 못한 두 사람이 소리를 높였다. 두 사람이 죽은 날은 12. 쿠로오의 발언을 듣고 충격에 휩싸인 표정으로 오이카와와 히나타는 서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파란 얼굴에서 자신이 한 말은 그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충격을 안겨줬다는 것은 알겠는데, 둘이서 거짓말이지, 그럴 리가 없다. 라는 말만 계속 중얼거리고 있으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저기 말야. 슬슬 설명해줬으면 하는데? 계속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당한 채 시간만 보내기는 싫거든?”


살짝 공격적인 태도로 나가자 오이카와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자신들이 잘못한 것이 맞다. 하지만 그것과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것은 별개였는지 오이카와는 히나타에게 네가 설명하라는 듯 눈빛으로 지시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대화를 하는 것은 쿠로오와 히나타여만 했다. 3자인 자신은 두 사람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니까 가만히 있는 것이 베스트였다. 굳이 쿠로오의 말을 빌리자면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이 옳다. 오이카와가 꽤나 배배꼬여진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채, 히나타는 그가 시키는 대로 쿠로오에게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대왕님과 전. 201712일에 죽었거든요.”

………………?”


이번엔 쿠로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어갈 차례였다. 표정에서부터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라고 의문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것만 같은 얼굴로 히나타와 오이카와를 차례로 바라본 쿠로오는 다시 히나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일본어도 한국어도 중국어도,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계속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까닥이는 쿠로오의 말에 따르듯이 히나타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미야기 뿐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지역에서도 강한 지진이 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왕님과 저는 그 지진으로 인해 박살난 무언가 에게 깔려, 죽었어요.”


쿠로오와 달리 히나타는 아직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웃으며 말할 수 없는 모양인지 그의 표정은 말을 내뱉을수록 점점 딱딱해져갔다. 그 표정을 보면 역시 자신이 이야기하는 게 나았나, 살짝 후회가 들었지만 자신은 3자라며 오이카와는 후회를 꾹꾹 안으로 눌러 담았다. 아무리 처참한 죽음이었다 해도, 그걸 제 3자인 오이카와가 말하는 것은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쿠로오도 히나타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무언가에 대해선 더 이상 묻지 않은 채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지진?”

쿠로 씨도 그렇게 죽은 거 아니었나요?”

…………. 아니야. 지진의 전조 따위 없었어. 나는 갑자기 철골이 떨어져서 죽은 거였으니까. 게다가 그렇게 큰 지진이 일어났다면 봄고에도 영향이 있었겠지. . 지진은 없었어. 확실해.” 


자신이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몇 번이건 확인을 하며 쿠로오가 부정했다. 기억이란 것은 애매해서 남이 이렇게까지 밀어붙이면 그랬었던 걸까, 하고 착각하게 되는 법이 있다. 하지만 쿠로오는 애매한 기억속에서도 확실하게 아니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것은 애매해도 그것만큼은 확실해. 힘 있게 부정했지만 히나타는 그래도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은지 힘 없이 반론을 입에 담았다.


, 하지만

게다가 내가 죽을 때 치비 짱도 같이 있었어. 이건 확실해. 내 마지막 기억이 켄마랑 네가 나를 보며 경악하고 소리지르는 거였으니까.”


애써 웃으며 쿠로오가 결정타를 날렸다. 쿠로오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쿠로오를 처음 만나는 거지만, 그는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말 없이 쿠로오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으면, 옆에 앉아있던 히나타의 입에서 부들부들 떠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저는 대체 뭔데요. 아직도 죽을 때의 기억이 이렇게나 선명한데.”


그 말에 오이카와는 히나타를 부르려 했지만, 그의 얼굴에 띄워진 표정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혼란과 분노, 그리고 지금이라도 울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슬픈 감정이, 아니, 방금 오이카와가 알아챈 것보다 더 많은 좋지 않은 것들이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동안 히나타에게 이런 감정들은 없을 거라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분하다거나, 무언가를 싫어하거나 꺼려하는 부류의 감정은 있다. 직접 보았으니 그것들에 대한 부정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주변에서 쉽게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단순명쾌한 부류의 것들일 것 이라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당연하다. 히나타도 인간이다. 0이나 1로 이루어진 로봇이 아니다. 그러니 그가 이렇게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복잡하게 꼬인 감정을 갖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난 치비 짱의 무엇을 봐왔던 걸까.’


내심 자부하고 있었다. 자신은 이 세계에서 히나타의 유일한 동료이며, 시합에서 토스를 올려줄 수 있는 사람이며,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그래서일까. 오만하게도 자신은 히나타 소요를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망상하고 있던 자신이 창피해지는 순간이었다.


당장 도망가고 싶다.’


쥐구멍이 있다면 지금 당장 들어가고 싶을 정도다.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덮으며 고뇌하기 시작하기도 전에, 쿠로오의 목소리가 오이카와의 정신 줄을 제대로 잡아주려는 듯이 낮게 울려퍼졌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신만이 아는 일 아닐까?”

쿠로 씨.”


신이라니. 판타지세계도 아니고 그런 게 있을 리가. 재미없는 농담은 집어 치우라는 듯한 표정으로 두 사람이 쿠로오를 째려보자 쿠로오는 그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치비 짱. 마음은 알겠지만 나에게 화를 내도 소용없다고 생각하는데? 알고 있잖아. 내가 한 말이 맞을지도 모르고, 내가 이유라던가 원인 같은 걸 알려줄 수 없는 존재라는 것도.”

그건, 그렇지만.”


쿠로오는 오이카와와 히나타와 똑같은 처지다. 게다가 혼자라는 점에서 오이카와와 히나타보다 데메리트를 많이 받았다. 그런 그에게 이 상황은 대체 뭐냐고 묻는다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히나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묻지 않고서는, 따지지 않고서는 어쩔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건 잘 알아. 나도 혼란스럽고 말야. 하지만 우리 셋 중 이게 무슨 일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하고 싶었던 것, 목표로 하고 있던 것이 있었겠지. 그리고 겨우 손에 얻었나 싶었을 수도 있고, 스타트라인에 섰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 희망은 최악의 기억을 남기고 최악에 형태로 사라지고, 우리는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였지.”

………….”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유는 몰라. 그걸 말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그런데 말야. 이유란 거, 꼭 필요한 걸까?”


쿠로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오이카와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히나타도 마찬가지였는지 오이카와처럼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 두사람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푸훗, 하고 웃은 쿠로오는 다시한 번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서 크게 의문을 갖지 말자는거야. 확실히 만화나 소설 같은 공상의 이야기 같은 상황에 처해버렸지만 말야? 여기는 현실이잖아. 공상속의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세상을 구하거나 그러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적어도 이 3년간 나는 아주 평화롭게 지내왔고,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 그러니까,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하지 못했던 일을 하는데 집중을 해보는 건 어떨까?”

??” 

“3??”

쿠로 씨 3년이라는 건 무슨 의미에요???”

, 역시 그쪽에만 신경 쓰는구나. 너희.”


쿠로오의 의견보다 그 쪽이 더 신경 쓰였는지, 두 사람이 동공이 열린 눈으로 쿠로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정작 쿠로오는 이 반응을 예상했는지 그저 허허 웃으며 두 사람을 자신에게서 떼어놓았다.


말 그대로. 나는 3년 전에 여길 왔다……. 고하면 조금 이상한가. 아무튼 그런 거야.”

아니아니, 그런거야. 라고 말해도 납득도 이해도 잘 안 가는데!!.”

말했잖아? 그런 거 신경 쓰지 말라고. 애초에 이 현상이 뭣 때문에 일어났는지도 모르는데 일일이 신경 쓰면 피곤하잖아. 그래서 선배로써 후배들에게 조언을 하고 싶은데 말야.”


3년 먼저 이 곳에 왔다면 확실히 선배다. 하지만 태도가 저래서일까. 오이카와는 쿠로오에게 반감 이외의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쿠로오도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오이카와의 반응이 귀엽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치 너희들에게 거부권은 없다는 듯 한 태도였다.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이미 휘말려버렸고, 일은 일어나버렸어. 그리고 거기서 끝이야. 뒤에 뭔가 일어나겠지만 그건 공상의 주인공처럼 있을 수 없는 일에 휘말리는 건 아니라고 봐. 그러니까 이 일에 대한 의구심은 버리고, 하고 싶은걸 하자고. 기껏 얻은 제 2의 인생인데 나오지 않는 문제를 풀다가 연습 같은 걸 게을리 했다간 나중에 후회하는 건 너희들 아냐?”

연습은 제대로 하고 있는데? 혹시 도마뱀 군은 잡생각을 하느라 연습도 제대로 못했던 거야?”


쿠로오를 비웃으려는 듯이 오이카와가 크게 제스쳐를 취했다. 하지만 쿠로오도 오이카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편은 아니었다. 오이카와의 눈에 보이는 도발을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받아치며 카운터를 걸었다.


오오. 훌륭한데. 하지만 말야, 기억이란 것은 말야. -청나게 애매한거라서 말이지? 잊겠다고 생각해도, 잊고 있었다고 생각해도 갑자기, 전조도 없이 올라오는 경우도 있단 말이지. 만약 그것이 1점을 다루는 시합에서, 자신의 손에 모든 것이 달려있을 때 갑자기 떠오른다면? 그럴 때를 대비해서 얼른 털어버리는 게 낫지 않겠어?”

………….”


반박은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저 말에 이것저것 반박할 수 있는 말이 몇가지 머릿속에서 떠올랐지만, 그것들이 오이카와의 입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어째서인지 말들이 목구멍에 턱하고 막혀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사실에 오이카와가 입술을 깨물자, 쿠로오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마저 이야기를 이어갔다.


니들도 미련 하나나 두 개정도는 있을 거 아냐? 그걸 하는 데에 집중하자고.”


우시지마를 쓰러트리고 전국에 가고 싶다.

이번에야 말로 그 오렌지코트에 서고 싶다.


서로를 만났을 때에 두 사람은 자신의 소망을 밝혔다. 쿠로오가 말한 대로 예전의 미련을 여기서 풀자고, 오이카와도 히나타도 생각했기에 한 일이었다. 쿠로오의 여기서 미련을 풀자라는 말에는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히나타는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오이카와는 어쩌면 이번에도,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신에게 미움 받는 남자다. 오이카와를 미워했기에 신은 오이카와가 중학교 1학년 때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그의 앞에 데려다놓았고, 그가 중학교 3학년일 때에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뒤쫒게 만들었다. 분명히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거나, 아니면 단순히 신에게 미움받지 않았다면 이런 편성이 될 리는 없다고, 오이카와는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이유로 오이카와는 이라는 존재에 대해 불신간이 엄청났다. 물론 이 세계에서라도 우시지마를, 카게야마를 꺾어버리고 미련을 떨쳐내고 싶다고 생각은 하고 있긴 하지만, 쿠로오처럼 아무 일도 없을 거야라며 이 상황을 신의 선물처럼 생각할 수 없었다.


납득이 안가는 표정이네.”

난 너처럼 이 상황을 그다지 낙관적으로 볼 수 없어서 말야.”

흐음-? 그럼 계속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떨면서 지내겠다는 거야?”

……!”


이번에는 그냥 참을 수 없었는지 오이카와의 몸이 살짝 움직였다. 쿠로오의 멱살을 잡으려다가 관둔 듯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히나타는 그저 긴장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쿠로오는 정곡을 찔렀어?’라고 묻는 것 같은, 사람의 성질을 건들만한 미소로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탓일까. 오이카와는 자리에서 일어나 쿠로오를 노려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몇 초를 대치하고 있었을까,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쿠로. 2분후에 버스…….”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은 것을 감지했기 때문일까, 켄마는 하고 싶은 말을 전부 다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런 소꿉친구의 반응을 본 쿠로오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대왕님. 우리 켄마 괴롭히지 말아줄래? 저래 뵈도 꽤나 섬세한 애거든?”

오히려 쿠로가 괴롭히고 있었잖아.”


한눈에 상황을 파악했는지 켄마가 크게 한숨을 쉬며 쿠로오를 탓했다. 오이카와는 죽일 듯이 쿠로오를 노려보고 있고, 쿠로오는 그런 눈빛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그저 웃고만 있고, 가운데에 낀 히나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있다. 굳이 켄마가 아니더라도 쿠로오가 오이카와에게 시비를 걸었다는 것이 쉽게 추론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소꿉친구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혹은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본 켄마는,


아무튼 난 전했으니까


라는 한마디를 남긴 채 벤치로 돌아갔다. 그런 켄마를 사춘기가 온 아들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본 쿠로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아직도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오이카와의 어깨를 팡팡 쳤다.


, 어디까지나 내 의견이었으니 그렇게 날 세우지 말라고. 친구.”

누가 친구야.”


쿠로오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오이카와가 사납게 뱉어내보았지만 쿠로오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친구지. 아니면 동지라는 말이 좋아? 아님 동료?”


-어느 쪽도 싫어.


그렇게 말하고 싶다는 듯한 표정으로 오이카와가 쿠로오를 바라보았지만 정작 본인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아하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이런 이런. 미움 받아버렸나? 곤란한데?” 

전혀 곤란해 하지 않는 주제에.”

그렇지. 솔직히 난 치비 짱이랑만 연락을 취할 수 있으면 족하니까.”


거기에 또 긍정을 하자 오이카와는 순간 다시 살의가 들끓는 느낌을 받았다. 히나타의 지인이건 표류의 선배이건 지금은 상관없었다. 계속 웃고만 있는 저 면상을 한 대 때리고 싶다. 하지만 자신은 이성인이다. 그렇게 되뇌이며 오이카와가 어떻게든 마지막 이성을 붙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면, 그 사이에 쿠로오는 자신의 연락처를 쪽지에 적어서 히나타에게 건내고 있었다.


이거 내 연락처. 어차피 또 만나겠지만일단 갖고 있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


쿠로오의 말에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히나타가 다급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저기, 쿠로씨. !!!!”

“-쿠로!!”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저 멀리서 켄마의 버스가 왔으니 얼른 튀어와라라는 의미가 함축된 단어가 들려왔다. 그의 재촉섞인 외침에 쿠로오는 지금 가, 라고 대답하더니, 히나타와 오이카와의 어깨를 팡팡 치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친구들.”

저기, 저 못 만.”

미안. 나중에 문자로 줘! 나 간다!!”


시야에 버스가 보이자 쿠로오가 급하게 정류장 쪽으로 뛰어갔다. 버스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히나타도 더 이상 쿠로오를 부르지 않았다. 그 대신 쿠로오가 쥐어준 그의 연락처를 무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야했다. 살짝 후회가 섞인 옆모습에 오이카와는 방금 전까지 쿠로오에게 화가 났었다는 것을 뒤로 밀어뒀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할 말이라도 있었어?”

? ??? . , 괜찮아요. ”


어느새 히나타의 말투가 존댓말로 돌아가 있었지만, 여러모로 혼란스러웠으니까. 라면서 오이카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요하다면 지금 받은 연락처로 쿠로오에게 연락 할 테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겠지, 라고 자신에게 되내이며 오이카와는 벤치로 가자며 손짓했다.


으음, 실은 엄-청 신경 쓰이지만. 묻는 것도 좀 그렇지…….’


여태까지의 오이카와라면 나중에 이야기해주는 것을 기다리겠다고, 귀찮은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자기도 모르게 히나타에 대해 꽤나 관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역시 오랫동안 같이 있으면 정이 생기는구나. 이젠 될대로 되라라고 생각하며 오이카와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왕님. 방금 전의 이야기 어떻게 생각해요?”


벤치에 앉아서도 말 없이 연락처만 바라보던 히나타가 겨우 입을 떼었다. 그 사실에 내심 이 공기가 무겁다고 생각하던 오이카와는 이 무거운 분위기가 그제서야 깨졌구나, 라고 안도하며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확실히 그 놈의 지론은 맞아. 원인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지. 생각을 포기하고 예전에 하지 못했었던.. 미련을 없애는데에 집중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겠지. 하지만 말야, 나는 당해온 게 너무 많은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낙천적인 생각은 도저히 못하겠더라고. 오이카와 씨가 예전에 좀 많이 착하게 살았다고 해도 이렇게 나에게 유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나? 그런고로 좀 많이 신중해지자는 것이 오이카와 씨의 의견.”

헤에. 대왕님. 많이 꼬이셨네요.”

신중한 거라고 생각해줄래? 치비 짱?”


히나타 왈 마왕 미소를 지으며 오이카와가 빵실 웃었다. 그 이상 무슨 말을 했다가는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 라고 주장하는 듯 한 표정이었다. 그 기백에 밀린 탓 인지 히나타는 버릇처럼 죄송합니다, 라고 외쳤고, 오이카와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알았다면 됐어, 라고 팔짱을 끼며 피식 웃었다.


그러는 치비 짱은 어떤데?”

?”방금 전의 이야기, 어떻게 생각해?”

.저는-. , 버스.” 


히나타가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저 멀리서 두 사람이 탈 버스가 보였다. 30초 이내에 도착할 것만 같은 거리라는 것을 깨닫자 두 사람은 허둥지둥 짐을 챙겨 표지판 옆에 섰다. 타이밍이 좋은 것인지, 나쁜것인지. 오이카와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버스 문이 열리는 것을 기다리고 있으면, 뒤에 서 있던 히나타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오이카와의 귓가에 닿았다.


뭐어, 저는 어느 쪽이던 상관없지만요.”

?”


하지만 바람소리와 버스의 엔진소리 때문일까, 그 목소리는 제대로 오이카와의 귀에 닿지 못했다.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한 번 말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히나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오이카와보다 먼저 버스에 올라탔다. 그 뒷모습을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오이카와였지만, 곧 운전기사의 재촉에 정신을 차리고는 히나타를 따라 버스에 올라탔다.


, 나중에 물어보면 되겠지.’


멀미하기 전에 얼른 자버리라며 갖고 있던 안대를 씌워주며 오이카와는 문제를 나중으로 돌렸다. 어차피 기회는 앞으로도 많다.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며 오이카와는 히나타의 옆에 봉지와 물병을 두고선 자신도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Posted by 카멜리스
2017. 4. 9. 01:11

 

4.

 

히나타의 집은 조센지에서 버스로 약 40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매일매일 아침 연습을 시작할 때 즈음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는 걸 보아하니 좀 더 먼 곳에 있는 줄 알았다.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리자 돌아온 대답은 매일매일 자전거 타고 통학하니까요였다. 그 대답을 들었을 때 오이카와는 한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분명히 그는 예전에 집에서 가까운 학교를 골랐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멀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치비 짱의 집은 시골에 있어요?”


무심코 놀리듯이 그렇게 말했을 때 돌아온 부정의 사자후는 아직도 트라우마다. 대체 뭘 먹었기에 저렇게 목청이 좋은 걸까. 그의 집에 비결이 있을 것 같았지만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근처엔 초등학교와 중학교만 있고……. 고등학교가 하나 있긴 하지만 거기에는 배구부가 없어서 제외. 그나마 가까운 곳 중에서 배구부가 있는 곳으로 온 것뿐이에요!”

정말 불모지에서 자랐구나. 치비 짱.”


배구부가 없는 학교가 주위에 있다니. 동정하는 눈빛으로 히나타를 바라보자 히나타는 얼굴을 한껏 부풀리고선 팔짱을 꼈다. 나는 지금 화가 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상태로 놔두면 나중에 반드시 성가셔진다. 귀찮다고 생각하며 그를 버스 안에서 달래고 있는 사이에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리고 3분정도 걷자, 여기저기 주택이 세워져 있는 골목길이 나왔다. 거기서 왼쪽으로 꺾어서 좀 더 걷자 히나타가 도착했어요! 라며 주택 한 곳의 대문을 열었다.

히나타의 집은 평범 그 자체였다. 바깥 구조도 평범, 집안 인테리어도 평범했다. 상냥한 부모님과 귀여운 여동생과 살고 있는 집. 부모님과도, 여동생과도 사이가 좋아서 그럴까. 히나타 가의 분위기는 따뜻하고, 안도감을 느꼈다. 물론 오이카와의 집도 따뜻했지만 그 곳에서는 안도감을 느낄 수 없었다.


원인은. 알고 있지. . 잘 알고 있어.’


그래. 알고 있다. 원인은 오이카와의 방의 창문 중 하나로 볼 수 있는 옆집의 소꿉친구의 방 창문 때문이었다. 그 창문은 마치 오이카와를 거부하는 것처럼 굳게 닫혀있고, 안을 볼 수 없게 두꺼운 커튼이 닫혀있었다. 그것이 왠지 그가 지금의 오이카와 토오루를 거부하는 것 같아서, 오이카와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대왕님! 대왕님 침대에서 주무실래요? 아님 밑에서?”

일단 내가 손님이니까 아래에서 자야지. ……, 그리고 치비 짱. 우리 존댓말 어떻게든 하자. 진짜.”


방금 전 가족들에게 이상한 눈빛을 받았다는 것을 떠올린 오이카와는 절박한 얼굴로 두 손으로 히나타의 어깨를 잡았다. 집에서 오고부터 계속 오이카와에게 존댓말을 쓰는 히나타를 가족들이 의아하게 여긴 것이다. 그 때는 벌칙게임이에요, 라고 다행히 얼버무릴 수 있었지만 앞으로 이 상태는 너무나도 곤란하다.


그동안 선배들이 지적하지 않고 넘어가서 잊고 있었어…….”

저도, 아니, 나도.”


왜 다들 지적을 안 한 걸까. 선배들은 재미있다고 그냥 넘어갔다고 쳐도, 아나바라는 성격상 분명히 지적을 하고 남았을 텐데 왜 아무말도 하지 않은 걸까. 계속해서 의문점이 솟아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하고 있으면, 옆에 앉아있던 히나타가 필사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 아니! 미안! 잊고 있었어!!”

아니아니. 나도 지적 안했으니까 나에게도 뭐라 할 자격은 없지만. 아무튼 앞으로 이것저것 서로 신경 쓰자. 그 수 밖에 없어.”


너무 편했던 탓일까. ‘지금에 안주해버렸다. 앞으로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고, 하물며 얼버무릴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지금까지 아무 일 없었던 것은 단순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

………….”


무거운 침묵이 히나타의 방을 지배했다. 그 침묵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오이카와가 히나타를 힐끗 보면, 히나타는 반성의 기색을 내보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 지금까지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걸까. 가끔 얼굴이 새파래지거나 침울해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을 잊은 채 그 모습을 재미있게 바라보던 오이카와는 곧 제정신을 차리고는 헛기침을 시도했다.


, 크흐흐흠. 잘까. 내일도 첫 차 타야하고.”

, ! 가 아니라 응!!”


어색한 대답과 함께 두 사람은 주섬주섬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오이카와가 제대로 이불을 덮었다는 걸 확인한 히나타는 리모콘으로 전등을 껐고, 한 순간에 방은 암흑으로 뒤덮였다.

내일부터는 새벽부터 밤까지 하드한 훈련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얼른 자지 않으면 곤란한 것은 오이카와인데 머릿속도 눈도 말똥말똥한 상태다. 남의 집에 와서 그런 걸까. 원인은 어찌되었던 얼른 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채 자려는 노력을 해보았지만 성과는 그닥 좋지 않았다.


………대왕님. 자요?”


이미 잠들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일까. 침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있던 히나타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오이카와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 탓일까. 쿵쾅쿵쾅 뛰는 자신의 심장께를 오른손으로 꾸욱 누르며 오이카와는 애써 괜찮은 척 싱긋 웃었다.


으응? 왜 그래, 치비 짱?”

혹시 깨웠어요?”

치비 짱. 말투.”

, , 내가 깨웠어?” 

아니! 오히려 내가 깨운 거 아냐? , ……. 계속 뒤척였고?”


옆에서 자는 사람을 신경 쓰이게 만들 만큼 자신이 뒤척이고 있었던 건 자각하고 있다. 미안, 이라고 짧게 사과하면 히나타가 당황한 듯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 보였다. 어느 정도 어둠에 눈이 익숙해진 탓일까, 지금 히나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대강 느낄 수 있었다. 표정이 보고 싶지만 지금은 당황하는 모습만으로 만족하자고 생각하며 그 모습을 관찰하고 있으면, 히나타의 표정이 순간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치비 짱?” 


순간 불안해졌기 때문일까. 오이카와가 조심조심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도 대답이 없어 내심 불안해하고 있으면, 히나타가 고개를 들었다.


대왕님.”

, ?” 


오랫동안 다물고 있던 입에서 나온 것은 의외로 진지한 목소리였기 때문일까, 오이카와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힘을 주었다. 지금이 밤이고, 불빛이 하나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빛이 있었다면 긴장했다는 얼굴이 히나타에게 전부 드러났을 테니 말이다. 아직도 히나타를 후배라고 생각해서 인지, 다른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오이카와는 그의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싶었다.


저기, 물어봐도 되요? 왜 집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지.”


이번엔 오이카와가 입을 닫을 차례였다. 답지 않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나 했더니, ‘터부를 건드려도 되는지 고민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방금 전의 침묵도 이해가 간다. 예전에 오이카와가 히나타의 터부를 건드렸을 때의 일을 떠올리고, 혹시 자신도 똑같은 짓을 하지 않을 까 고민하고 있는 거겠지.

이 문제는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걸 두 사람을 알고 있다. 그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다. 그렇기에 오이카와는 지금 히나타가 내뱉은 질문이 가볍게 내뱉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언제나처럼 장난스럽게 비밀~.’이라고 어영부영 넘어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말을 내뱉기까지 고민하고 고민했을 테니까.


………왜 묻는 건데?” 


그래서 장난스럽게 넘기지 않고 제대로 마주하기로 했다. 한가 지 오산이 있었다면, 자신도 모르게 낮은 소리가 나갔다는 것이었다. 그 목소리에 히나타는 물론이고, 오이카와의 표정에도 당혹감이 서렸다.


, . 치비짱-? 오이카와 씨는 화난 게 아니에요! 그냥 단순히 호기심에 물어본 걸까?”

………….”

. 망했다.’


뒤늦게 밝은 목소리로 변명을 해보았지만 여전히 무거운 침묵은 계속되고 있었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이런 문제가 되면 난 맨날 치비 짱에게 실수만 하고 있다 말이지.’


반성은 하고 있고, 이후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이것저것 어떻게 할지 생각은 하고 있지만 결과는 계속 이 모양 이 꼴이다. 왜 평소처럼 받아칠 수 없는 걸까. 자신의 한심함이 짜증났는지 크게 한숨을 내쉰 오이카와는 각오를 다지듯이 주먹을 꽉 쥐었다.


“-이와 짱이 무서워서야.”


그의 대답에 베게에 얼굴을 박고 있던 히나타가 고개를 들었다. 히나타가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확인한 오이카와는 천장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여기에 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와 짱이랑 한 번 만난 적이 있어. ‘오이카와 토오루가 배구를 관둔 탓인지 두 사람의 사이는 서먹한 상태였지만.”

 

[ 이와짱. 나 배구 다시 시작했어!! ]

 

그 골을 메우고 싶은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만나 그렇게 외쳤다. 오이카와에게 있어서 이와이즈미 하지메라는 존재는 소꿉친구라는 것으로 설명하기 부족한 존재였다. 어렸을 적부터 함께 배구를 하고, 같은 팀에서 에이스와 세터로써 고등학교 마지막 시합 때까지 함께 울고 웃고 떠들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을 그 절망의 바다에서 끌어올려준 구원자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일까.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놓고 싶지 않았다. 여태까지 함께 싸워왔던 전우를, 자신을 구원해준 존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눈앞에 있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이와이즈미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와이즈미 하지메라는 존재와 서먹한 관계로 있고 싶지 않다는 것이 본심이었다.

두 사람이 서먹해진 이유는 틀림없이 배구겠지. 그러니 배구를 시작하면 오이카와는 서로가 잘 알고 있는 관계로 되돌아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주제에 말이다.

 

[-어차피 지금뿐이잖아. 기억을 되찾으면 또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텐데.]

[-뭐가 아니야. 아닐 거란 보장이 어디 있어. 나는 이미 너에게 실망했는데.]

[-돌아가. 내 비위 맞추려고 배구 할 생각도 하지 말고. ]


그러니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도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이카와는 이 세계와 제대로 마주하려 들지 않았다. 머리로는 다른 세계다. 라고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마음속 어디서 엔가에는 자신이 원래 있던 세계에 대입했고, 언젠가는 다들 오이카와가 알던 언제나처럼 대해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오이카와의 오만에 대한 질타였다.

너의 장소는 여기에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밀어내는 이와이즈미의 말에 오이카와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창피했다. 그제서야 현실을 깨달아버렸다. 그리고 증오했다. ‘오이카와 토오루. 자신의 구원자를 실망시키게 만든 그가 , 있을 곳을 제 손으로 무너트린 그가 너무나도 미웠다. 그와 동시에 오이카와는 이제 두 번 다시 이와이즈미를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나는 것이 무서워졌다. 또 다시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는 것이 두려웠다. 배구를 사랑하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그의 입으로 부정당하는 것을 듣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래서 가고 싶지 않아. 가면 이와 짱을 만날 테니까.”


물론 오이카와는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다. 간단히 그 곳에서 이와이즈미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만을 간단히 이야기 한 오이카와는 이걸로 끝! 이라며 이야기를 완결시켰다. 뭐라고 하면 좋을지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을까. 강한 후회의 감정을 막고 싶었는지 오이카와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히나타는 이해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해는 바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가라앉은 기분을 외면하고 있으면,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할 만큼 계속 따라 붙는 강한 후회를 떨쳐내기 위해 이를 악 물고 있었다.


대왕님!!!”

우와아아악???”


하지만 그럴 겨를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갑자기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이 끌어내려지더니, 방금 전 까지 새카맣게 물들어 있던 시야가 조금 밝아졌다. 그리고 보인 것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히나타의 얼굴. 예상하지도 못했던 상황에 어리둥절해 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히나타는 입을 열었다.


만나러가요! 이와이즈미 씨!”

…………?”


목적어는 있지만 누가’ ‘어째서’ ‘라는 문장이 빠져있었기 때문일까. 오이카와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몇 초정도가 지나야 그것이 이와이즈미를 만나러가자라는 뜻이라는 것을 이해한 오이카와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이 아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은 것일까. 분노가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각을 확하고 올라왔지만, 참아야한다고 생각하며 억지로 그 감각을 억눌렀다. 여기서 큰소리를 치며 화를 낼 수는 없다. 그렇게 자신에게 몇 번이나 되뇌이며 오이카와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치비 짱. 치비 짱. 내 이야기 제대로 들었어? 이와 짱은 말야.”

하지만 그 때 제대로 이야기 해본 건 아니잖아요? 저는 그렇게 들렸는데.”

………….”


히나타의 지적에 오이카와는 무심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때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말에 반박하지 못한채 도망쳐버렸다.

 

-뭐가 아니야. 아닐 거란 보장이 어디 있어. 나는 이미 너에게 실망했는데.

-돌아가. 내 비위 맞추려고 배구 할 생각도 하지 말고.

 

그 말을 들은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맞설 기력을 전부 잃어버렸다. 그는 오이카와가 배구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기에, 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면서 배구를 계속 해봤자 나는 너에게 실망한 채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며 먼저 벽을 만들었다. 그리고 오이카와는 그 벽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말았다. 자신이 오이카와 토오루가 아닌 이상, 이와이즈미와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아니, 처음부터 오이카와가 알던 원래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그래서 도망쳐버렸다. 그리고 지금도 그와 마주하는 것이 무서워서 계속 도망치고 있었다.


…………만나서 뭘 어쩌라고.”

만나서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죠.”


계속해서 아픈 곳을 찔려오는 히나타를 원망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오이카와가 중얼거렸다. 누워있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히나타의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빛나는 것 같다. 저 시선이 무섭다고 생각하면서도, 시선을 피할 수 없다. 마치 뱀 앞에 있는 개구리가 된 것 같은 심정이다. 무심코 침을 꿀꺽 삼킨 오이카와는 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어떻게든 말을 쥐어짜냈다.


무슨 이야기를? 실은 난 네가 알고 있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아니야, 라는 이야기라도 하라고?”


지금 옳은 것은 히나타고, 틀린 것은 자신이다. 그런 것 정도는 구별할 수 있는 이성은 갖고 있었지만, 그걸 인정하면 히나타에게 지는 것 같아 오이카와는 억지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치비 짱. 그들은 나를 오이카와 토오루라고 알고 있지만, 실상 나는 그 녀석이 아냐. 나는 이 세계에 있어서 이방인이고, 표류자인데. 있을 곳이 없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뭘 더 어떻게 하겠어??”

그렇다고 지금 이대로 있을거에요?”


히나타의 말에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입을 닫았다. 평소에는 나는 생각이 없다, 머리가 비어있다는 듯이 행동하는 주제에 중요할 때엔 본질을 찔러온다. 언젠가 보았던 시선이,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있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게 확신 할 수 있었다.


이대로 있을거에요? 그래도 괜찮아요? 대왕님?”

……괜찮을 리가 없잖아!”


그렇다. 괜찮을 리가 없다. 괜찮지 않다. 이대로 이와이즈미와 평생 타인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전부 끝나버렸다고? 치비 짱? 전부 늦어버렸어.”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실망했고, 오이카와는 그런 이와이즈미에게서 도망쳐버렸다. 그걸로 전부 끝난 것이다. 그것이 마지막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이카와는 멍청하게 그 기회를 날려버렸다.

싫다. 그런 건 싫다. 이와이즈미와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평생 우시지마에게 이기지 못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오이카와에게 있어선 이와이즈미 하지메라는 존재는 없어서 안 될 존재였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나아가 보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아는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이 세계에서 어떻게든 혼자서 나아가보려고 했다. 아무도 없는 심해 속에 표류되었다는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출발이라고 생각하며 어떻게든 버티고, 아픔을 묻고, 모르는 척하면서 평소의 오이카와 하지메를 연기했다. 또 다시 물로 인해 숨통이 막히는 것 같은 나날이 계속되었지만, 이건 어리석은 자신에게 주어진 대가라며 오이카와는 힘겹게 심해 속에서 버텼다.


그런 거, 누가 정했어요?”

……?”


히나타의 말에 오이카와가 덜미를 잡힌 사람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히나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건 시합이 아니잖아요. 시합 끝, 게임오버라는 개념은 없어요. 대왕님.” 


전혀 생각도 해보지 못한 발상에 순간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작아졌다. 하지만 쓸데없는 오기가 생겨서일까. 그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이유를 만들고 싶어서였을까. 오이카와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반론을 시작했다.


“이, 이와 짱은 나보고 돌아가라고 했어. 그건 더 이상 네 얼굴도 보기 싫다는 거잖아.”

하지만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마, 라는 말은 안했잖아요.”

그게……! 그거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힐 뻔했지만, 다행히 오이카와의 입에서 큰 소리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순간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목소리 용량에 안심한 오이카와는 작은 목소리로 반론을 시도했다.

히나타의 말은 억지로 들리지만, 실은 정론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에게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거나, 그 얼굴 보이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인정해버리면, 이와이즈미에게는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자신이 먼저 거리를 둔 것 같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오이카와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이와이즈미를 만나선 안 될 이유를 대기 시작했다.


, 이와 짱은 나와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아 하는데, 제대로 이야기가 될 리가…….”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든 이와이즈미씨를 잡아 놓을게요!”


이야기를 들어줄 때까지 절대 그 자리에서 못 움직이게 할 테니 안심하세요. 맡겨만 달라는 듯이 히나타가 두 주먹을 꽉 쥐는 제스쳐를 취했다. 어째서일까.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들어달라며 이와이즈미에게 매달리는 히나타가 떠올랐다. 분명히 시선을 확 끌겠지. 맡겨도 되는 걸까. 라고 생각하며 오이카와는 또 다시 반론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만나서, 어쩌라고. 뭘 말하는 거야?” 

대왕님의 본심이요.” 


히나타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오이카와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오이카와 토오루 건, 대왕님이건, 일단 지금은 그 문제는 넘어가고, 현재 대왕님이 무얼 생각하는지, 뭘 하고 싶은 지 말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들어주지 않는다면?” 


아직도 자신을 거부하며 발걸음을 돌리는 이와이즈미의 모습이 뇌리에 남아있다. 오이카와를 거부하겠다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그에게 이야기를 한 들 그는 들어줄까. 자신의 본심은 닿을 수 있을까. 불안한 듯 오이카와는 자신의 왼쪽 가슴팍을 꽉 잡았다.


그럼 선언을 하죠!”

……선언?”

언젠가, 제가 카게야마 녀석에게 했던 것처럼-.”


히나타의 표정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를 듣고 알 수 있었다. 그 때의 일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아직 그도 전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외치고 도망치죠 뭐. 제가 잡고 있을 테니 싫어도 들을 것 아니에요.”


오이카와의 머릿속이 한 순간 정지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바보 같은 일이다, 쓸데없다, 라는 말이 떠다니고 있었지만 정작 오이카와의 입에서 나온 것은 허탈한 웃음소리뿐이었다.


………………하하. 뭐야 그건. 엉망진창이잖아.”

그래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 안 해요?” 


어둠속에서 히나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에, 그가 내놓은 해답에 오이카와는 한동안 벙찐 얼굴로 히카타를 바라보더니, 곧 히나타의 웃음이 전염되기라도 했는지 그를 따라 작게 웃기 시작했다. 어처구니없었다. 하지만 왜일까. 그 방법도 괜찮다고 생각해버렸다.


그러게. 확실히 좋은 방법이야.”


지금 생각해보면 이와이즈미의 말은 일방적이었다. 그러니 이쪽도 일방적으로 공격해줘도 상관없겠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과거의 자신이 바보같아졌지만, 그래도 지금 안 것이 어디냐고 생각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와짱이 도망가지 못하게 막아준다는 건……. 치비짱 도 같이 와주겠다는 거?”

그럼요!”


두 주먹을 꽉 주며 결의에 찬 얼굴의 히나타를 본 순간 그를 놀리고 싶어졌기 때문일까. 저 자신만만한 얼굴을 당황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이라고 생각하며 오이카와는 미소를 띄웠다. 히나타가 보면 히익, 마왕의 미소다. 라고 할 정도로 불온한 미소였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위가 어두운 탓에 히나타가 그 미소를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 나랑 같이 이와 짱에게 혼나줄 거지?”

“-.”


전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일까. 히나타의 움직임이 한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예상대로의 모습에 오이카와는 재미있어졌는지 일명 마왕미소를 짙게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뭐야, 치비 짱. 나한테는 이와 짱을 만나러가라, 라면서 등을 떠밀어 준 주제에 이젠 나몰라라 하는 거야? 이젠 나를 내버려 두는 거?” 

, 같이 혼나드릴읍읍!”


오이카와의 풀죽은 연기가 통했기 때문일까. 히나타가 각오했다는 듯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컸기 때문일까. 오이카가 이런 미친, 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히나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히나타도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는지 오이카와의 행동에 큰 저항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초 정도 있었을까. 다행히 옆방에서 자고 있는 나츠가 깨어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걸 다행으로 여긴 두 사람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치비 짱? 조용히 할 거지?”


원인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주제에 모든 잘못은 히나타에게 있다는 듯이 물으면, 히나타는 그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오이카와가 손을 떼는 와중에도 히나타의 입에서 대왕님이 잘못한 거잖아요. 라는 질타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바보인건지, 아니면 도량이 넓은건지. 순간 생각한 의문에 그냥 이건 바보다. 라고 결론을 내리며 오이카와는 입을 열었다.


그럼 휴일날 가는 걸로?”


골든 위크 중 3일은 훈련, 4일은 각자 집에 돌아가서 쉬라고 들었다. 아마도 히나타는 이 때 즘 이와이즈미를 만나러가자고 주장한 것이겠지. 오이카와의 추측이 맞다는 듯이 히나타가 고개를 끄떡이자, 오이카와는 크게 한숨을 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알았어. 그 날 돼서 도망치기는 없기야.”


-도망치고 싶은 건 너면서.

입 밖으로 내뱉은 자신의 말에 오이카와는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비난의 말을 내뱉었다. 제대로 그와 마주하자고 결심한 지금도 실은 도망치고 싶다. 그 마음을 숨기기 위해 히나타에게 짖굳은 말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혐오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걱정 마세요! 절대 도망 안갈테니까요!”


자신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두드리는 히나타를 보며 오이카와는 쓴 웃음을 지었다. 알고 있다. 오히려 히나타는 가기 싫어하는 오이카와를 끌고 갈 아이지, 절대 당일에 도망칠 아이가 아니었다. 알면서도 묻는 건 어디까지나 심술이고, 자신에 대한 혐오감 때문이다. 하지만 히나타는 오이카와의 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기쁘다는 감정을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럼 잘까. 치비 짱. 시간도 늦었어.” 


히나타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미묘한 기분을 껴안은 채 오이카와는 안녕히 주무세요, 라고 말하는 히나타에게 가벼운 대답을 해주고선 다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갔다.

 

* * *

 

그 날, 꿈을 꾸었다.

여전히 오이카와는 심해 속에 가라앉아있었고, 숨을 쉬는 것도 힘들었는지 팔다리를 필사적으로 휘젓고 있었다. 오이카와 본인도 그 모습이 꼴사납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살고 싶었기에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이윽코 힘이 다 빠졌는지 그의 팔다리가 축하고 늘어졌다.

-아아, 이젠 지쳤어.

-……포기할까.

-숨이 막히는 건 익숙하잖아. 괜찮아. 또 다시 익숙해질 수 있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을 끌어올려주었던 구세주는 이젠 없다. 그러니 여기서부턴 자신 혼자서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버텨보았지만 이젠 한계였다.

힘낼 수가 없다. 수면 밖으로 올라갈 수 없다. 그러니 포기하고 숨이 막힌 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누군가가 오이카와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게 누구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오이카와의 몸이 서서히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슨 꿈을 꿨더라.”


꿈은 거기서 끝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꿈의 내용은 일어나자마자 전부 잊어버렸다. 꿈을 꿨다는 자각은 있지만, 그것이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 왠지 껄끄러웠다.


뭐 어때. 그냥 꿈이고.’


만약에 악몽을 꿨다면 기분이 찝찝했을 텐데, 그런 기분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쾌해졌다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어서, 오이카와는 더 이상 생각을 관둔 채 이불에서 나왔다.

Posted by 카멜리스
2017. 3. 29. 01:15

1.

 

케이지 2223. 신선조의 총장 산난 케이스케 사망.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이야기로, 실제로 산난 케이스케는 살아있었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아니게 되었지만.

그 광경을, 과정을, 원인을, 치즈루는 보았다. 보고야 말았다. 보아서는 안 될 장면이었지만, 불행의 여신은 치즈루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만든 붉은 색 액체는 산난의 몸을 침식시켜 고통스러워하게 만들고, 그의 머리를 새하얗게 물들어버리고, 총명했던 갈색눈동자를 이형과 같은 붉은 색의 눈동자로 만들어버리고, 그의 이성을 집어삼켰다. 피를 달라, 목이 마르다. 애원하듯이, 갈망하듯이 산난은 계속 중얼거리며 치즈루의 목을 졸랐다.

오키타가 아니면 분명히 그녀는 죽었다. 다행히 그의 난입덕분에 목숨은 건졌고, 산난도 이성을 되찾아 나찰조를 이끌게 되었다. 신선조의 비밀을 알게 된 치즈루는 원래라면 처분당해야 했지만, 약을 만든 코우도의 딸이며, 그를 찾는 데에 필요한 존재니 굳이 죽일 필요는 없다라는 의견이 과반수를 이뤄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가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산난이 죽은 것으로 처리되고, 거점이 니시혼간지로 옮겨는 둥 여러 가지가 눈 깜빡할 사이에 변해 한동안은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지만, 아직 치즈루는 그 날의 공포를 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떨쳐내려고 해도 처음 신선조에 수감되었을 때 들러붙었던 공포처럼, 그 광경은, 그 고통은 소리 없이 찾아와 치즈루를 괴롭히고 있었다.

변한 것은 또 한 가지가 있었다. 야마자키가 치즈루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여태까지 신선조의 비밀을 겉면만 알고 있던 치즈루가 비밀 그 자체를 알아버린 것이다. 경계하지 않을 수 없겠지. 머리로는 잘 알고 있다.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듯이 주장하고 있었다.



[ 나는 감찰반으로써 당신을 신용하지 않아. 그것이 나에게 내려진 임무다. ]

[게다가 나는 감찰반이라는 입장에서 유키무라 군을 의심하지 않으면 안 돼. 그래도 네 처우가 좋아지는 방향으로 노력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 ]


 

앞날은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자신에게 되뇌이고 있었지만 치즈루는 자만하고 있었다. 이 나날이 계속될 것이라고, 마음속 어디선가 에서는 그게 진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니 이 것은 과거에 그렇게 생각했던 자신에 대한 벌이다. 언제나 선을 그어 행동하지 않았던 대가가 이렇게 돌아온 것이다. -라고, 그렇게 자신에게 되뇌어보았지만 그녀의 안에서 슬프다는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말을 걸면 대답해주고, 저쪽에서 치즈루에게 말을 걸어주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지만, 치즈루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쓸쓸하다고만 생각했다.



* * *

 


뭐야. 너도 와 있었냐. 여긴 애들 놀이터가 아니라고


싫은 것을 보았다는 듯이 신선조 9번조대장, 미키 사부로는 치즈루의 얼굴을 보자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현재 그와 치즈루가 있는 곳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절때부터 쇼군이 상경할 때 숙소로 만들어진 니죠성의 문 앞이었다. 지금 이 곳은 10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메모치가 체재하고 있고, 신선조는 그의 경호를 위해 출동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 임무에서 치즈루가 맡은 것은 전령의 역할이었다. 분명히 모두 앞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줬는데 미키는 지금 알았다는 듯 한 태도로 치즈루를 깔보기 시작했다.


저도 놀러온 건 아니에요. 확실히 전령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 그래.”


전혀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미키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미키 사부로. 그는 이토가 신선조로 왔을 때 함께 온 이토파의 인물 중 한명이자, 이토의 친동생이기도 했다. 신선조에는 그저 형이 들어가니까 나도 들어 간다라는 느낌으로 들어온지라, 신선조의 사람들을 깔보는 경향도 많았다. 물론 치즈루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다른 신선조의 사람들보다 더욱더 깔본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첫 만남 때 혹시 너, 간부전용의 유녀냐? 이 곳 남자들은 정말 취미가 나쁘군.’라고 막말을 던졌을 정도니 말이다. 물론 간부들은 그 자리에서 치즈루는 남자고, 아직 어려서 여자같이 보일뿐이다라고 치즈루를 변호해주고 미키를 비난했지만, 미키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한귀로 흘려들을 뿐이었다. 이 후에 이토에게 무어라 들었는지 사과를 해왔지만 형이 시켜서 한 것이 티가 팍팍 나고 있었다. 그 후로 치즈루에게 시비를 거는 일은 없었지만, 치즈루를 깔보는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치즈루가 미키를 꺼려하는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검도 제대로 차지 않은 꼬맹이가 쇼군의 경호에 끼어들다니, 정말이지 그 녀석들도 너에게 참 관대하네.”

……확실히 저는 무사도 아닌, 단순한 시동이지만, 그래도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어요. 전령을 말해도 될까요?”


자신의 허릿춤에 있는 소태도를 보고 비웃는 미키를 똑바로 바라보며 치즈루가 입을 열었다. 무사라면 보통 협차, 소도, 또는 단도를 타도와 함께 쌍을 이뤄 차고 다니는데, 이것은 사무라이의 개인적인 명예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명예를 상징하는 것이 없는 치즈루는 이토가 데려온 사람들에게 계속 무시당하고 있었다. 다른 간부들이 이 아이는 사무라이가 아니라 잠시 협력관계에 있는 아이다라고 대변은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치즈루에 대한 험담이 멎는 일은 없었다. 콘도가 나서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지만, 그랬다간 치즈루에 대해서 파헤치는 놈들이 많아질 뿐이다, 라고 히지카타가 말렸기에 그가 나서는 일은 없었다. 결국 누가 괴롭히면 말해. 라는 식으로 끝맺었긴 했지만, 치즈루는 어떻게든 자신의 선에서 끝내고 싶어서 계속 참고 있었다.


“-말해 봐.”


치즈루의 말에 미키는 더 이상 비꼬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 전 까지 치즈루를 깔보고 있던 눈빛마져 사라져, 한 순간 치즈루는 당황했지만 되도록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시마다에게 들었던 전령을 입에 담았다.


국장은 성내에서 인사를 하고 있는 중이며, 다른 분들은 계속해서 경호를 부탁드립니다.”

알겠다. 전달은 확실히 들었다.”

…….”


비아냥거리지 않고 제대로 전달을 들었다고 말한 것이 의외였기 때문일까, 어떻게든 유지하고 있었던 포커페이스를 무너트린 치즈루가 얼빠진 소리를 내며 미키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소리가 잘 안 들린다라던가 아무리 말해도 잘 못알아 듣겠는데라고 시비를 걸거나 괴롭힐 줄 알았다. 그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난 탓일까, 미키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말야. 확실히 너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건 일이라고? 물론 너에게 잘못을 뒤집어 씌워 일을 망치자는 녀석이 있었긴 했지만 그렇게 된다면 형님에게 민폐가 되니까 안하는 거라고? 고마워하지 못할망정 그 표정은 뭐야.”

, .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일단 안심해도 되는 것이겠지. 얼떨떨한 심정으로 감사의 인사를 해보았지만 미키는 그저 코웃음만 칠 뿐, 치즈루의 감사에 대해 일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전령은 야마자키가 하는 거 아냐? 녀석은 뭐하고 너 따위가 대신하고 있냐?”


역시 제대로 이야기를 들은 게 아니었나보다. 미키가 치즈루를 비하하는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미키의 가시 돋힌 말에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야마자키씨도 성벽의 경비를 맡고 계세요. 여러분처럼 한곳에 계신 게 아니라 이곳 저곳 왔다 갔다 하고 계시지만요.”

불쌍하네. 그 녀석도. 무사도 아닌 누구누구가 일감을 빼앗아서 밤새 쉬지도 못하고 왔다리 갔다리 하고 있으니 말야.”

그건……!”

- 몰라. 너 전령이잖아. 여기서 농땡이 피우고 있어도 되냐. 얼른 가버려.”


마치 벌레를 쫒아버리는 듯 한 제스쳐를 취하며 미키가 치즈루에게 툭 내뱉었다. 그런 그에게 치즈루는 더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확실히 지금의 자신은 일을 하는 중이었고, 미키와 잡담을 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미키가 마지막으로 전령을 전항 대상이었다는 것 정도였을 뿐일까. 살짝 분하다는 표정을 어떻게든 숨긴 치즈루는 허리를 숙이며 실례했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고선 원래 위치로 발걸음을 옮겼다.


…………실수, 했을지도.’


옛날이라면 미키의 비아냥거림에도 반박은 거녕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 자리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방금은 너 따위가 대신하고 있냐?’라는 말에 울컥해버렸다.

언제부터일까. 선을 넘어오기 시작한 것은. 언제나 남을 대할 때는 선을 긋고, 그 선 바깥의 인물로서, 방관자로써 지내왔다. 언제든지 사라지기 쉽도록,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채이지 않도록. 그렇게 살아가고,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왜 자신은 선을 넘어버린 것일까. 왜 욕심을 내게 된걸까. 생각하면 산난이 나찰로 변하기 전에 산난을 위해 을 조사하자고 생각했다. 예전이라면 거기까지 생각은 하겠지만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치즈루는 움직였다. 그 날의 자신에게 의문을 가지며 치즈루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답을 찾았다.


그때는 그저, 산난 씨의 괴로운 모습이 보기 싫어서…….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었어.’


동기는 단순히 그것뿐이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되고 싶다라는 것. 물론 예전에도 누군가를 돕고싶다는 생각은 자주 했었고,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별로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도움을 주었지,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자신은 그렇게 행동한 것인가. 머릿속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답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고서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선을 넘어가고 싶었던 걸까.”


나온 답을 입 밖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제서야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확실히 자각했는지 치즈루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다행히 다리는 멈추지 않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버렸다. 남에게 무언가를 바라서는 안 되는데, 선을 넘어 그들에게 접하면 안되는데, 어느 샌가 자신은 그 법칙을 깨고 행동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행동하고 있었지?


[ -애썼어. 노력해줘서 감사해. 유키무라 군. ]

 

그 물음에 대답해 주듯이 야마자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아마도 그때부터다. 야마자키가 치즈루의 노력을 인정해줬을 때, 치즈루의 안에서 선을 넘고 싶다는 생각이 싹터버린 것이다.


………그 대가가, 이걸까.’


가져서는 안 될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다. 차가워져버린 야마자키의 태도를 떠올리며 치즈루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잠시 숨을 돌린 그녀는 잠시 말없이 발 아래를 바라보다가, 곧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자신의 얼굴을 짝 소리가 나도록 세게 3번 이상을 때렸다.


………좋아.”


제대로 원래대로 돌아가자. 이번엔 실수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듯이 중얼거린 치즈루는 다시 전령 일에 집중했다.

선 바깥으로 넘어가지 말자, 대가를 바라지 말자,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도록, 자신의 비밀을 내보이지 않도록 주의하자. 그것이 남들과 다른 체질을 가진 치즈루가 크게 상처입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 *


 

니죠성 주위에는 낮의 순찰용과 다르게 하얀색 하오리를 입은 대사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보였다. 어두운 나머지 같은 편을 공격하지 않도록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지만, 언제나 물색 하오리만을 보았던 치즈루는 그 모습이 아직도 어색하게 보였다.


다들 긴장은.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손조과격파인 쵸슈의 낭사들은 지금 쫒기고 이는 상태고, 여기에는 신선조만 있는 게 아니라 막부의 호위무사들도 있으니 경비는 몇 배나 더 엄중했다. 그러니 만의 하나의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지. 그리고 치즈루도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다.


“-!!!”


갑자기 등줄기가 오싹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감각은 몇 번이나 느껴본 적이 있었다. 검을 겨누어졌을 때, 핏줄기가 선 눈으로 노려져 봤을 때의 감각.

-살기다.

머리가 그것을 깨닫기도 전에 치즈루는 자기도 모르게 소태도에 손을 가져간 채 살기가 흘러나오는 곳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화톳불에서 멀고, 달빛으로 만들어진 성벽 그림자의 안쪽이었다. 빛이 없는 밑도 끝도 없는 어둠속에, ‘그들이 있었다.


“-호오, 눈치 챈 건가. 생각보다 둔하지 않다는 거군.”


만족스럽다는 듯한 목소리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처음엔 한명이라고 생각했지만, 치즈루의 예상과 다르게 어둠속에서 걸어 나온 것은 세 명의 남자였다. 금발에 살짝 노란 빛의 기모노를 걸친 남자, 검은색의 하카마를 입은 붉은 머리의 남자, 왼쪽어깨부터 손까지 화려한 문신을 한 갈색 빛의 피부를 가진 남자의 모습을 확인한 치즈루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 삼켰다. 가운데의 남자의 시선이 무서웠기 때문일까, 마치 화살에 세게 몸을 꿰뚫린 사람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저 시선들이, 무섭다. 마치 뱀 앞에 서 있는 개구리의 기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상대는 자신과 격이 다르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기 때문일까, 치즈루는 그의 앞에서 무엇을 해도 전부 허사로 돌아갈 것만 같다는 절망을 느꼈다.


정신, 그래, 정신, 차리지 않으면. 침착해.’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듯이 치즈루는 고개를 저었다. 저들에게 정면으로 맞서서 이길 수는 없다. 그렇다고 무조건 도망칠 수 있을 리 없다. 분명히 잡힐게 뻔하다. 최대한 머리를 굴리며 치즈루는 눈앞의 세 람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이름만 알고 있지만, 가운데에 서 있는 남자, 카자마 치카게는 예전에 이케다 야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이케다 야 사건때, 사이토를 따라 정면으로 돌입한 치즈루는 2층의 헤이스케와 오키타를 찾아달라는 지시에 따라 먼저 2층으로 올라갔다. 그 곳에서 만난 것이 카자마였다. 오키타와 대치하고 있던 그는 마치 어린아이를 상대하듯이 오키타를 갖고 놀고 있었다. 검술로는 확실히 오키타가 뛰어났지만, 상대는 그것을 압도할만한 힘과 속도를 갖고 있었다. 어떻게든 오키타를 돕고 싶었던 치즈루는 찻잔을 던져 그의 신경을 분산시켰고, 그 틈을 타서 오키타가 카자마에게 공격을 가했지만 카자마는 그 공격마저도 피하고선 그에게 카운터를 먹였다. 기절해버린 그를 지키듯이 치즈루가 소태도를 뽑아 들고 사이에 난입했지만, 그 때 카자마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채 치즈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 “그 소태도, 네것인가?”]

 

그 시선의 끝이 자신의 소태도에 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은 그 한마디를 들었을 때였다. 그 말에 긍정하듯이 제 것이에요라고 대답하자, 카자마는 피식 웃으며 물러나주었다.


[ “소태도 덕분에 살아남았군.” ]

 

그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진 그가 사츠마 쪽의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이케다야의 사건이 끝난 이후였다.


아마도 함께 있는 것이 같은 사츠마 쪽의 아마기리 큐조 씨와. 초슈쪽의 시라누이 쿄, 씨인가.’


예전에 야마자키가 정리해온 정보를 대조해보며 치즈루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은 예전에 이케다야 뿐만이 아니라 금문의 변에서도 신선조의 앞을 가로막았던 자들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쇼군을 어떻게 하러 온 것일까. 소리를 지르는 것이 나을까, 하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소태도의 칼자루를 꽉 잡으며 치즈루가 입을 열었다.


.. 왜 당신들이 여기 있죠.”

어째서라는 건 우리가 어떻게 여기로 들어온 것인지를 묻는 거냐?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지. 우리들 오니 일족에게는 인간이 만든 장애물 따위 의미가 없으니까.”


물론 치즈루가 원한 답은 왜 그들이 여기에 있는 것에 대한 대답이었지, 시라누이가 대답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에 대해 항의를 하고 싶었지만 이 이야기를 계속 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리라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녀가 항의하기 위해 입을 열기 전에, 아마기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어떤 목적을 위해 이 곳에 왔습니다. -유키무라 치즈루, 당신을 찾기 위해서.”

………?”


왼쪽 가슴께에 파묻혀 있는 심장이 커다란 고동음을 울렸다. 왜 이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걸까. 당혹함과 무서움이 심장에 스며들어가 더욱 더 크게 펌프질을 하기 시작했다.


, 당신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치즈루의 반론에 시라누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카자마는 미간을 찌푸렸다. 두 사람 다 치즈루가 알고 있는데 모른척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마기리만큼은 그녀의 말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니를 모른다고? 제정신으로 말하는 거냐?” 화난 표정의 카자마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그 기백에 겁을 먹었기 때문일까. 치즈루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카자마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아마기리가 아이를 거르는 듯 한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상처를 입으면 금방 아물지 않습니까?”

“!!!!!!”


정곡을 찌르는 말에 치즈루가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런 그녀의 퇴로를 막듯이 아마기리는 사정없이 말을 이어갔다.


보통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상처가 빨리 아물지 않습니까?” 


아마기리의 계속되는 공격에 치즈루의 얼굴이 이 이상 창백해질 수 없을 정도로 새파래지기 시작했다. 어째서일까, 왜 그가, 그들이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일까. 비밀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사람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치즈루는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살아왔다. 되도록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선 바깥에서 계속 고독한 채로 지내왔는데. 어째서 이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 그렇지, 않아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자신이 생각해도 거짓말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들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크게 한숨을 쉬거나, 어이없는 표정으로 치즈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마기리만큼은 표정을 움직이지 않은 채 치즈루의 진의를 확인하고 있었다.


아앙? 모른다고?”

, 몰라, . 당신들이 말하는 오니도 처음 들어보는 단어고…….”

뭣하면 증명하게 해줄까? 상처구멍 하나 둘 열면 싫어도 인정하게 되겠지.”


철컥, 하고 시라누이의 총구가 치즈루에게 겨누어졌다. 그 모습에 정말로 자신의 위기를 느꼈는지 치즈루가 급히 소태도를 뽑았다. 총과 검. 심지어 실력은 저쪽이 위. 덜덜거리는 손과 다리로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쓸데없는 발버둥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안하고 당하기는 싫었다.


시라누이. 귀중한 여자오니에게 상처를 낼 생각이냐.”

그치만 이 녀석이 인정할 생각을 안 하니까.” 


나도 어쩔 수 없다고. 카자마의 제지에 귀찮다는 태도를 취하면서도 총을 내리는 시라누이의 모습에 치즈루는 내심 안도했다. 하지만 시라누이는 여전히 불만이 있는지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무어라 불만을 내뱉고 있었지만 카자마도 아마기리도 전혀 들으려는 시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자신의 시야에서 지운 것처럼 행동하던 카자마는 치즈루가 들고 있는 소태도에 시선을 주더니, ‘많이는 말하지 않겠다.’ 라며 운을 띄웠다.


“‘동쪽의 오니를 뜻하는 유키무라의 성과 그 소태도………. 증거로써는 충분히 갖추어져 있어. 이 이상의 증거는 필요 없을 정도다.”

……?”


유키무라의 성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그리고 그때, ‘소태도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라는 것은 그런 의미였던 것일까. 칼자루를 잡은 손은 어느 샌가 식은땀으로 흥건해져 있었지만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계속해서 벌벌 떨면서도 제대로 경계태세에 들어간 치즈루를 보며 평화롭게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카자마가 귀찮다는 듯이 다시 크게 한숨을 쉬었다.


말해두지만 널 데려가는 데에 네 동의는 필요하지 않아. 여자 오니는 귀중하다. 같이 와줘야겠어.” 


딱 한번, 딱 한번이었다. 딱 한번 눈을 깜빡였을 뿐인데 어느샌 가 카자마는 치즈루의 코앞까지 이동해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 난거지. 자신의 상식과 맞지 않은 광경에 치즈루가 그 의문을 머릿속에 띄웠다. 그 의문의 답을 스스로 찾기도 전에, 카자마가 손을 뻗어왔다.


이 손에 잡히면 끝이다.


머릿속의 경종이 그렇게 고하고 있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누군가, 누군가!!!’


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뿐이었다. 눈을 꽉 감으며 머릿속으로 그렇게 외친 순간-, 하얀 검날이 어둠을 찢어발겼다.


“-어이어이, 밀회라면 좀 더 분위기 있는 곳을 고르는 게 낫지 않아?”


그리고 뒤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치즈루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야에 보이는 것은 하얀 천에 톱날무늬가 수 놓여진 하오리.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는 언제나 자신을 신경써주던 붉은색 머리의 남자의 목소리였다.

거짓말. 어떻게 여기에. 믿을 수 없다는 마음 반, 안도한 마음 반으로 치즈루는 자신을 지키려는 듯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또 네놈들이냐. 시골 개들은 코만큼은 특화되어 있는 모양이야.”

………그건 이쪽이 할 말이다.”

하라다 씨! 사이토 씨!” 


카자마의 비아냥에도 그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반론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확실히 무표정일 텐데 현재 그는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그들이 와주었다는 것이 더 기뻤기 때문일까, 치즈루는 안도한 표정으로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아까 전부터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 수 없는 말, 이해하면 안 될 것 같은 말만을 계속 듣고, 마지막에 자신을 데려가겠다는 그들의 행동에 혼란스럽고 무서웠던 상황에서 자신을 구하러 와주었다. 그 사실에 안도했기 때문일까. 계속해서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던 실이 끊어진 것처럼 치즈루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제대로 서라.”


하지만 그녀가 완전히 주저앉기 전, 무골한 손을 가진 누군가가 그녀의 팔뚝 부분을 잡아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해주었다. 긴 머리에 날카로운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히지카타 씨.”

물러나 있어.”


상황이 상황인지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고 치즈루에게 간단히 지시를 내린 히지카타는 타도를 뽑아들며 그녀를 뒤로 숨기듯이 앞으로 나서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쇼군의 목을 노리고 왔나 싶었더니, 이런 꼬맹이 한명에게 무슨 볼일이냐?” 


히지카타가 상대를 도발하려는 듯이 비릿하게 웃었다. 옆에서 하라다가 역시 오니부장이야라고 작게 웃는 

목소리가 뒤 이어 들려오자 카자마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화가 난 표정으로 그르렁 거렸다.


쇼군도 네놈들도 지금은 어찌되던 상관없다. 이건 우리들 오니들의 문제다. 끼어들지 마라.”

오니라고?”


카자마의 대답에 히지카타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대의 발언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의심하고 있다는 듯 한 눈초리에 치즈루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저 눈을 몆 번이나 마주한 적이 많았기 때문일까, 조건반사로 몸을 떤 치즈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도 있었냐. 이 녀석의 면상을 보는 것은 금문의 변 이후구만.”

이게 바로 썩을 인연이라는 녀석인가. 별로 기쁘지는 않지만 말이지.”

재회라는 의미로는 여기도 마찬가지다만………. 난 아무런 감상도 떠오르지는 않는군.” 

저희들의 방해를 할 생각입니까. 그렇다면.”


총과 창을 서로에게 겨누며 씨익 웃는 두 사람과 달리, 아마기리와 사이토의 사이에는 언제 서로 공격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서로 틈만 보이면 언제든지 공격에 들어갈 것이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그들을 보며 치즈루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내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앞의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자기도 모르게 뽑아든 소태도를 잡고 자세를 취하려고 하는 그녀를 제지하듯이 검은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


갑자기 어둠속에서 툭 튀어나온 검은 팔에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일 뻔한 치즈루였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비명이 아니라 공기뿐이었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바로 그 짝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조차 제대로 인지할 틈을 주지 않은 채 검은 팔의 주인이 작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을 걸어왔다.


유키무라군. 나야, 정신 차려.”

, ……….”

하고 싶은 말은 알겠지만 일단 심호흡부터 해. 너무 굳어있어.”


야마자키의 지시에 따라 어떻게든 심호흡을 하고선 옆을 보면, 그 곳에는 복면을 썼지만 익숙한 얼굴이 치즈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치즈루를 똑바로 바라보며 야마자키는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부장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

, 그렇지만.”


거기까지 말한 치즈루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에 있으면 자신은 방해만 될 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이 곳에 있는 것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옛날로 돌아가자. 그렇게 다짐한 게 아까전인데 그걸 또 잊어버리고 있다. 그런 자신에게 실망감을 느꼈지만, 정신 차리라는 듯이 그녀의 손목을 꽉 잡는 야마자키에 의해 치즈루는 다시 현실로 끌여 내려졌다.


무례하다는 건 안다. 후일에 다시 사과를 할 테니 지금은 참아줘. 부장의 명령이다. 이대로 널 둔소까지 호위할거다. 내 속도에 맞추기 위해서 손을 잡고 달리게 될 건데, 괜찮나?”

……….”


마음속으로는 여기서 도망치라는 건가요, 라고 반론하고 싶었지만 여기 있어 봤자 치즈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이 곳에서 얼른 벗어나는 것이 낫다.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치즈루가 고개를 끄떡이자 야마자키가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그의 지시대로 소태도를 집어넣자, 야마자키는 지시에 따라줘서 고맙다, 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평소라면 두 사람 모두 얼굴을 붉힐만한 상황이었지만 사태가 사태 인만큼 효율적인 방법을 고른 것이었다. 야마자키는 복면 때문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치즈루는 마음이 가라앉아있었기에 그 행동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야마자키가 여전히 대치하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서로만을 바라보며 틈을 보고 있는 오니들의 시야에 치즈루가 벗어나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야마자키가 치즈루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뛰라는 신호다. 야마자키에게 이끌려가듯이 출발했지만, 어떻게든 구르지 않고 그의 속도에 맞춰 치즈루는 필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냐! 공주님!”

아아, 도망 칠 수 있다고!”


시라누이가 그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야마자키에게 총구를 겨누었지만,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하라다의 공격이 들어와 그의 행동은 실패로 끝났다. 카자마도, 아마기리도 상황은 비슷했는지 계속 공격해오는 사이토와 히지카타 덕분에 야마자키와 치즈루는 무사히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야마자키의 손에 이끌려 달려가며 치즈루는 무의식적으로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마기리의, 시라누이의, 카자마의 눈빛이 마치 등 뒤에 달라붙은 듯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들을 떨쳐내고 싶다는 일념을 담아, 치즈루는 야마자키의 손만을 의지하며 어둠속을 달렸다.

 


* * *

 


도착했다. 수고했어. 유키무라 군.”


둔소, 니시혼간지의 문을 통과해서야 야마자키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전속력으로 달렸기 때문일까. 치즈루는 물론 야마자키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언제나 바깥에서 체력을 쓰는 일을 하는 야마자키와 달리, 되도록 둔소에서 생활하고 있던 치즈루는 현재 지옥을 맛보고 있었다. 최소한 토는 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어떻게든 숨을 고르고 있으면, 그런 치즈루가 안쓰러웠는지 야마자키가 등을 쓸어주었다. 그렇게 몇 분정도가 지났을까. 겨우 진정이 되었다는 듯이 감사를 표현을 하는 치즈루를 보고 야마자키는 뭔가 미안하다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다. 너무 빨랐나.”

, 아뇨! 괜찮아요. 오히려 거기서 얼른 나올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야마자키 씨!”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치즈루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그녀를 진정시킨 야마자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신없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기 때문일까, 다시 한 번 엄습해오는 불안함 때문인지 치즈루는 긴장을 풀지 못한 채 치즈루는 말없이 등 뒤의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괜찮아. 아무리 그 녀석이 강하다 해도 부장님과 하라다 씨와 사이토 씨를 뿌리치고 여기까지 쫒아올 리 없어.”


야마자키는 어디까지나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치즈루는 그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는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 네요. 니죠 성이랑 여기는 꽤나 멀리 떨어져있고요. 그리고,”


아무리 그들이 상식을 초월한 존재들이라 해도 쉽게 그 세 사람을 뿌리치고 이 곳까지 쫒아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야마자키 씨가 함께 있어줘서, 안심이 되요.”


이 말은 진심이었다. 만약 이 곳에 혼자였다면 치즈루는 이미 불안감에 짓눌려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야마자키가 곁에 있다. 혼자가 아니다. 그 덕분에 치즈루는 조금이지만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치즈루의 대답이 의외였기 때문일까. 야마자키가 한 순간 놀랐다는 듯 한 눈을 했지만, 곧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신뢰해줘서 고마워.”


그 한마디에 치즈루는 마음속에 무언가가 북받치는 느낌을 받았다. 오랜만에 그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한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곧바로 부장이 계신 곳으로 돌아가면 안 돼.”

………….”


조금만 더 대화를 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고 입을 열려는 차에, 야마자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다, 전령역이었던 자신이 빠지게 됨으로써 야마자키와 시마다가 그 자리를 메우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치즈루는 자신도 모르게 돌아가겠습니다.’ 라고 내뱉으며 움직일 뻔했지만, 그 전에 야마자키가 진정하라며 살짝 어이없다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들의 목적은 유키무라 군이다. 만약 네가 돌아가면 녀석들은 2차로 공격해올지 몰라. 만의 하나의 일이 일어나면 곤란하니 유키무라군은 둔소에서 대기해주길 바래.”

알고 있다. 여기서 자신이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을. 하지만 그들에게, 야마자키에게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니 순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움직이면 상황은 더 악화된다. 자신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도 그들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치즈루는 고개를 끄떡였다.


알겠어요.”

다들 쇼군의 경호로 나가 있으니 현재 둔소에는 남아있는 대사가 별로 없어. 그러니 오키타 씨나 토도 씨와 함께 있는 것이 안전할 거야.”

…….”

그럼, 뒤는 부탁한다.”


그 한마디만을 남기고 야마자키는 문을 빠져나가 다시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혼자가 되었기 때문일까. 갑자기 밤의 적막이 치즈루의 주위에 내리 앉았다. 한동안 야마자키가 사라진 어둠을 조용히 보고 있었기 때문일까. 갑자기 치즈루의 머릿속에 방금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 사람들은 대체 무엇이었던 것일까. 왜 자신을 오니라고 불렀던 것일까. 왜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머릿속에서 의문만이 솟아올랐지만 그것에 대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마나 그 자리에서 어둠속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대로는 안 된다 생각했는지 치즈루가 고개를 저었다.


혼자 있으면 이상한 생각만 날 것 같아. 야마자키 씨가 말한 대로 오키타 씨나 헤이스케 군에게 가지 않으면-.’


거기까지 생각한 치즈루는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에 오기 전 까지 야마자키와 꽉 잡고 있던 손이다. 처음에 그와 손을 잡았을 때, 자신이 체온이 내려간 탓인지 그의 손이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달리는 도중에 치즈루의 체온도 돌아와 서로의 체온과 땀으로 뜨겁다고 느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열은 전부 식어있었다.

그 손을 한동안 내려다보던 치즈루는 크게 심호흡을 두어 번 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내일부터 다시 원래대로행동할 수 있어.’


지금은 불안감에 눌려죽을 것 같아서 무리지만, 한번 자고나면 가능할 석이다. 그렇게 암시를 하듯이 머릿속으로 몇 번이건 중얼거린 치즈루는 히로마 쪽을 바라보았다. 불이 켜져 있으니 누군가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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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카멜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