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3. 13. 09:53

0.

 

스르륵, 하고 붕대가 풀리는 소리가 히로마(広間)에 조용히 들려왔다. 원래라면 아주 작은 소리여서 제대로 들릴 일은 없겠지만, 붕대를 맨 대사와 그것을 지켜보는 헤이스케를 포함한 다른 대사는 그 소리가 지금은 무엇보다 크게 들려왔다. 오랫동안 붕대를 매고 있던 탓일까. 대사의 다리에는 붕대와 각목을 댄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실례합니다. 예의바르게 환자에게 양해를 구한 치즈루는 그의 다리의 상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꿀꺽, 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고 환자가 생각하고 있으면, 진찰을 끝낸 치즈루가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축하드려요! 완치에요!!!”

오오오오오!!!”

, 이자식! 축하한다!!!!!”

, 아파요! 아픕니다 토도 조장!!!!”


그녀의 완치 선언에 그 자리에 있던 오키타를 제외한 소수의 대사들이 환자보다 먼저 일어나 환호했다. 완치 선언을 받은 대사는 지금 내가 뭘 들었나,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곧 토도의 헤드락 공격에 겨우 현실로 돌아왔는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토도가 겨우 자신을 놔주자 그는 자신의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통증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방방 뛰고, 잠시 바깥으로 나가 가볍게 달리기를 하고 왔다.

아프지 않다. 그 사실이 겨우 머리로 인식되었는지 그는 살짝 눈물을 머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대사- 카와구치는 코를 훌쩍하더니, 울었다는 것을 얼버무리기 위해 실망이라는 듯이 크게 어깨를 떨구는 제스처를 취했다.


-. 완치라니. 이제 다시 나가쿠라 조장의 지옥 훈련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그 모습에 치즈루는 후후, 하고 조용히 웃었고, 헤이스케를 포함한 다른 대사들은 헤죽헤죽 웃고 있었다. 둔한 치즈루도 눈치 챌 정도로 그의 연기는 정말 어색했다. 그래서일까, 다들 저 녀석을 놀려주자. 라고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는 헤이스케의 의견에 찬동하듯이 다들 살짝 고개를 끄떡였다. 다들 자신의 의견에 찬성하겠다는 의사를 확인한 헤이스케는 옆에 앉아있던 치즈루에게도 까발리지 말라는 듯 검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며 씨익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 즐거워보였기 때문일까. 헤이스케처럼 장난기가 발동한 치즈루는 그의 장난에 동조하겠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그래 너! 그 동안 훈련 빠져서 살 맛 났지?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고?”

맞아 맞아. 꽤 대사들 사이에서 유명했었지. 카와구치 군.”


멈칫.


헤이스케와 오키타의 말에 공포를 느낀 탓일까. 마치 오뚝이가 움직이다가 갑자기 멈춘 것처럼 카와구치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게 멈추었다. 사람이 저런 자세로 오랫동안 멈출 수 있구나. 내심 대단하다고 느끼는 치즈루와 달리 이 상황이 즐거운지 악당 같은 미소를 짓고 있던 헤이스케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내가 신팟 짱에게 잘 말해서 늦은 만큼 확실히 훈련은 하게 해 줄 테니까 걱정 말고?”

, , , ,토도, 토도 조장.”


하고 싶은 말은 확실히 있는데 그것이 제대로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지 카와구치가 정신 줄을 놓은 듯 어버버 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불쌍했지만 아직 밝히지 말라는 오키타의 제지에 치즈루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야기를 해버릴 것이라고 멋대로 생각했기 때문일까. 다른 대사들이 그녀의 말을 막듯이 웃으며 묵직한 한 마디를 웃으며 내뱉기 시작했다.


그래그래. 너 저번에 스즈키가 나가쿠라 조장에게 굴려질 때 엄청 놀려댔잖아. 그 대가라고 생각해.”

맞아 맞아. 다른 사람들에게 막 말한 만큼 대가를 받는 거야. 포기해.”

, 으으으…….”


절망했다는 표정으로 카와구치가 털썩 주저앉았다. 저렇게 큰 소리가 나는데 무릎은 괜찮은 걸까. 의사의 딸이자 현 신선조의 의료 쪽을 맡고 있는 치즈루는 방금 완치 판정을 받은 그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고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일까. 카와구치가 빼액소리를 질렀다.


동정하지 마! 동정하지 말라고! , 흐윽. 흐극흐그그극.”

, 저 나가쿠라 씨가 그렇게 까지는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치즈루가 아는 나가쿠라는 상냥한 부류에 속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물론 초반에는 치즈루를 경계하느라 차가운 태도를 취하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이것저것 챙겨주고 있는데다 치즈루를 보는 눈도 상냥해져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런 나가쿠라를 이렇게까지 무서워하는 그가 치즈루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하고 있으면, 절망하던 카와구치가 치즈루의 어깨를 딱 하고 잡았다.


잘 들어. 유키무라. 확실히 다른 조장들도, 토도 조장의 훈련도 빡세고 힘들고 울고 싶지만, 그 중에 나가쿠라 조장의 훈련은 그야말로 지옥이라고!!너같이 근육도 없고 뼈만 있는 꼬맹이는 금세 나가 떨어질걸??????”

, 하아.”


속사포로 나가쿠라의 무서운 점을 쏟아내는 카와구치를 상대로 치즈루는 하아, , 그렇군요. 라는 긍정의 답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가쿠라의 무서운 점을 이야기하고 있으면, 그는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벌떡 고개를 들었다.


그래! 유키무라! 너도 같이 훈련 받자!! 나가쿠라 조장의 특별 훈련! 그럼 이 빈약하고 계집애 같은 몸에 조금이라도 근육이 생겨서 듬직해 질...푸악!!!”

작작 해라. 이 망할 녀석아.”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이 상황을 즐기며 실실 웃던 헤이스케가 표정을 싹 바꾼 채 카와구치의 팔뚝부근을 뻥하고 차버렸다. 옆으로 찬 덕분에 카와구치가 치즈루에게 해를 입일 일은 없었지만, 현재 헤이스케의 얼굴은 그야말로 오니 그 자체였다. 갑자기 험악해진 분위기 탓일까. 그 누구도 말을 하지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다들 이 분위기가 된 이유를 금방 알아챘지만 단 한사람. 이 분위기를 만들어 낸 카와구치만은 사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멀뚱멀뚱 뜬 채 그에게 차인 팔뚝부분을 잡으며 헤이스케를 올려다보았다.


, 헤이스케 군.”

저기 말야. 카와구치 군. 그런 말 보다 먼저 치즈루 짱에게 해야 할 말이 있는 거 아닐까?”

……할 말?”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오키타도 조금은 화가나 있었는지 카와구치에게 던지는 질문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오키타의 질문과 헤이스케의 태도를 곱씹어보아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지 카와구치는 헤이스케에게 맞은 부위를 어루만지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얼굴을 찌푸린 것은 맞은 장소가 아파서였지만, 그게 지금 상황에 대한 불만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를 내려다보던 헤이스케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넌 널 열심히 치료해준 녀석에게 고맙다는 말은 거녕 매도 하냐?”

……….”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는지 카와구치가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케다야 사건 때 다리에 부상을 입었었다. 하지만 원래라면 이렇게 시간을 끌만한 부상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케다야 사건 때 카와구치보다 더 심하게 다친 사람도 지금은 대부분 완치해 텐노 산으로 향했으니까. 하지만 카와구치는 그러지 못했다.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붕대는 갑갑하다고 풀질 않나. 나는 이 정도 상처에 굴복하지 않는다. 정신력으로 다 나았다는 헛소리를 하며 다친 다리를 마구 쓰지 않는 둥 여러 기행을 일삼았고, 의료담당인 야마자키와 치즈루에게 나는 이미 다 나았다며 허세를 부렸다. 부상자들 중에 치즈루는 물론, 야마자키의 지시에 제대로 따르지 않은 대사들은 많았지만, 그 중 으뜸을 뽑는다면 두사람은 망설임없이 카와구치라고 말할 것이다. 그 정도로 카와구치는 골칫덩어리였다.

하지만 아픔이라는 것은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오래 가는 법. 결국 카와구치는 다리가 너무 아프다, 이제 못 쓰는 게 아니냐고 반쯤 울면서 야마자키에게 달라붙었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게 그는 장기임무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카와구치의 치료는 치즈루가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치즈루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그였지만, 지금 자신을 치료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녀밖에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는지 치즈루에게 치료를 맡기고 그녀가 지시하는대로 따랐다. 하지만 예전부터 치즈루를 계집애 같은 놈, 비실비실한 놈, 눈엣가시 같은 놈으로 취급하던 카와구치였기에 치료를 할 때마다 치즈루에게 시비를 걸었지만, 치즈루는 카와구치의 치료를 대충하지 않았고, 그 결과 완치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맙다는 말은 거녕 매도를 하고 있으니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는 헤이스케와 오키타는 물론,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평대사들도 이건 아니라며 카와구치에게 비난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주위의 공기도 그렇고,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급히 치즈루와 시선을 맞추고 고개숙여 사과했다.


미안했다. 유키무라. 그리고 고마워. 나는 평생 이 다리로 살아가야한다고 생각했어. 여태까지의 무례를 용서해줘.”

, , 그게. 저는 괜찮아요.” 

아니, 그동안 나는 너를 밥이랑 방만 축내는 쓸모없는 식객이라 생각했어! 실은 이렇게 실력 좋은 의사였는데도 말야! 너는 내 검의 길을 구해준 은인이야!”

그래, 유키무라! 너는 이 놈의 은인이야! 처음에는 검도 제대로 못 쓰는 호리호리하고 계집애 같은 녀석이 갑자기 나타나서 부장님의 시동이 되고 간부들의 사랑을 독차지해서 얼굴로 꼬셨나하고 생각했지만 전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사과할게! 부장님이 그냥 얼굴로 사람을 뽑을 사람은 아니지! . 이제 납득했어!”

맞아! 우리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

너희들, 그거 칭찬?”

당연하지요!”

……. 너희들. 해도 되는 말이 있고 해선 안 되는 말이 있는 거, 모르냐?”


카와구치가 사과했기 때문일까. 다른 대사들도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한명 두 명 그녀에게 그동안의 무례를 사과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게 정말 사과인지 아닌지 미묘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계속되는 그녀를 향한 계속되는 무례한 말에 오키타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다들 무슨 소리냐는 듯이 칭찬하고 있다, 사과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헤이스케는 그걸 그녀에 대한 모독이라고 받아들였는지 낮은 목소리로 평대사들에게 조용히 경고를 보냈다. 이게 어딜 봐서 고맙다고 하는 사람의 태도인가.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그들을 노려보면, 평대사들은 오해라는 듯이 손 사례를 쳤다.


, 아니에요. 저희는 그저 유키무라에게 그동안의 무례를 사과하고 싶어서……!”

처음에는 얼굴도 이름도 계집애 같은 게 어디서 우리 신선조에, 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케다 야에서 활약하는 것을 보고 인정했다고요!!! ”

맞아요!!! 저도 그 후로는 유키무라를 깔보지 않는다고요!!! 그가 온 후로 밥도 맛있어졌고, 깨끗해지고 옷도 찢어지면 정비되고!! 오히려 감사하고 있다고요??”


하지만 전혀 감사하는 것 같지 않다. 인식이 바뀌었다는 것은 확실히 알겠지만, ‘쓸모없는 비실이에서 쓸모 있는 비실이로 승격했다는 듯 한 인식에 오키타는 살짝 한숨을 쉬고선 입을 열었다.


저기, 너희들.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지 않을래? 지금 너희들이 한 말을 사과랍시고 들어봐. 어떤 기분일 것 같아?”


오키타의 지적에 잠시 히로마에 침묵에 내려앉았다. 치즈루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고 있지만 헤이스케가 그걸 말리고선 오키타에게 소지, 나이스. 라고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오키타는 그의 신호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그제서야 자신의 말 실수를 알아차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평 대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해했으려나?”

, !! 죄송합니다! 오키타 조장!”

너희들, 진짜 머리 나쁘네. 사과해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이잖아.”

죄송했습니다! 유키무라 씨!!”

도게자도 필요 없으니까-!! 정말 괜찮아요! 괜찮아!!”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오키타가 싸늘한 미소를 짓자, 그 모습에 겁을 먹은 평대사들은 바로 치즈루에게 석고대죄를 하며 입을 모아 외쳤다. 치즈루가 정말 괜찮다고 옹호를 했지만 그 사죄는 약 몇 분간 이어졌고, 그 상황을 만든 오키타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치즈루를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 일단 완치 판정도 받았겠다. 슬슬 카와구치를 쓸 만한 것으로 만들어볼까. 신팟짱들도 슬슬 텐노 산에서 돌아올 때고?” 


곤란해하는 치즈루를 도와준 것은 헤이스케쪽이었다. 자리에서 갑자기 일어나더니 뚝뚝 소리를 내며 몸을 풀며 그렇게 말하자 그 자리에 있던 평대사들의 얼굴이 일제히 새파랗게 질렸다. 신선조 중 지옥 같은 훈련을 시키는 것을 누구냐고 한다면 다들 나가쿠라의 이름을 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조장들의 지도도 편하다는 것은 아니다. 나가쿠라보다는 덜하지만 헤이스케의 지도도 죽을 맛이 드는 정도였다. 그런 그의 지도를 이렇게 불시에 받게 되다니, 대사들은 다들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한 채 터덜터덜 일어났다. 그런 대사들의 기합 빠진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헤이스케는 얼른 얼른 안움직이냐고 크게 외쳤고, 그 호령에 대사들은 알겠습니다라고 외치며 4발로 달려나가거나 달려나가다가 넘어지는 둥 온몸으로 다급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이 달려나갈 때 눈물이 맺혀있었던 것 같은 건 기분탓일 것이다. 그렇게 본 것을 외면하며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치즈루에게 헤이스케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다가왔다.


치즈로. 미안. 저 녀석들 제대로 혼내 놓을 테니까.”

, 아냐! 헤이스케군 !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치만 저녀석들. 치즈루가 얼마나 도움을 주고 노력하는데 그렇게 말하고.”

아냐. 헤이스케 군. 저분들은 날 인정 해주신 거야. ”


치즈루는 그들의 인식이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신선조에게 있어서 치즈루는 짐 같은 존재다. ‘보아서 안될 것을 본 목격자인 그녀는 신선조에 있어서 위험요소였다. 처음에는 여자라는 이유로 바로 살해당하지 않고 처분을 어떻게 할 것인지 회의가 열렸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유키무라 코우도라는 것을 알고서는 그의 수색을 도우라는 이유로 둔소에 부장의 시동이라는 직책으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간부들도, 평 대사들도 그녀의 존재를 환영하지 않았다. 오키타는 계속 그녀를 베겠다고 말버릇처럼 말하고, 히지카타는 가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가 하면, 하라다나 나가쿠라, 헤이스케도 치즈루를 좋게 봐주건 해주기는 했지만 곤란한 것을 보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건 했다.


, 치즈루. 그건.”


그녀의 인정이 무슨 뜻인지 알아챈 헤이스케가 당황하며 뭐라 변명하려 했지만, 치즈루는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다른 간부들도 지금 나한테 잘해주시고……. 헤이스케 군도 오키타 씨도 나를 많이 도와주시는걸. 나는 그 사실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생각해.”

치즈.”

치즈루 짱은 바보구나.”


감동받은 헤이스케의 기분을 깨버리듯이 오키타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내뱉었다. 그리고 헤이스케가 자신의 말에 반박하기 전에 그의 행동을 봉쇄하듯이, 그의 머리에 자신의 팔과 톡을 올려놓았다. 밑에서 헤이스케가 무겁다고 항의를 해보았지만 오키타는 그저 좋은 위치에 팔걸이가 있다며 헤이스케의 항의를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겨우 그런 걸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얼마나 행복의 기준치가 낮은 거야.”

아뇨. 충분히 행복한걸요.”

……이상한 아이네.”


오키타의 쓴 웃음이 섞인 악평에도 치즈루는 그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오키타는 비릿한 미소를 띄우며 계속해서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말야. 치즈루 짱. 잊으면 안돼? 우쭐해져서 이상한 짓을 하면 우리는 망설이지 않고 널 베어 버릴 거니까.”

소우지!”


그가 웃으면서 내뱉은 냉철한 말에 헤이스케는 당황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돌아온 것은 왜 그래. 사실이잖아라는 정론이었다.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헤이스케가 입을 다물었지만 그녀에게 무어라 해주고 싶었는지 뭐라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만을 지으며 입만 뻥끗거리고 있었다.


, 아냐. 헤이스케 군. 괜찮아. 잘 알고 있는걸!”

그래도…….”


치즈루가 괜찮다는 듯이 두 손을 내저었지만 헤이스케는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헤이스케. 슬슬 저 녀석들 훈련 봐주러 가야하지 않아? 조장이 여기서 땡땡이 치고 있어도 되는 거?”


정말 괜찮다니까. 치즈루가 그렇게 말해도 끙끙대고 있던 헤이스케의 등을 밀어 준 것은 이 대화를 딴 나라의 일처럼 여기고 있던 오키타였다. 그 말에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듯이 헤이스케가 작게 비명을 지르자, 오키타는 조장이 그래도 되는 건가-? 히지카타씨에게 일러버릴까-. 라며 재미있는 것을 보는 표정으로 헤이스케에게 계속해서 한마디 두 마디 던졌다.


, 치즈루! 이따 방으로 갈께! 이따 봐!”

헤이스케 군! 조심해!”


방금 전 대사처럼 지금이라도 성대하게 구를 것 같은 헤이스케의 뒷모습에 치즈루가 충고를 했지만, 지금의 헤이스케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복도 쪽에서 그가 성대하게 구르는 소리가 날 것 같아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치즈루와 달리, 오키타는 개구쟁이의 표정을 지으며 복도를 쿵쾅쿵쾅 뛰어가는 헤이스케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대사들의 기합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한 오키타는 재미없다는 듯이 하품을 하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럼 나도 들어가서 낮잠이나 잘까나-.”

. 그럼 약을 먼저 드시고 주무시는 게…….”


오키타가 이번 텐노 산 전투에 참여하지 못한 이유는 감기였다. 그래서 히지카타가 출병하기 전에 그녀에게 오키타를 잘 봐달라고 부탁을 했고, 부탁을 받은 치즈루는 시간이 되면 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그때마다 오키타는 싫은 표정을 대놓고 짓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제 먹었잖아.”

이 약은 식후에 드시는 거에요. 오키타 씨.”

………….”

라고,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죠.”


치즈루의 말에 오키타는 시선을 돌린 채 묵비권을 시전 했다. 이런 대화가 이루어진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불리해지면 입을 닫는 오키타였지만 치즈루는 익숙하다는 듯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라고 선언하며 치료도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여유로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일까. 오키타는 다시 한 번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너도 참 힘들겠네. 자신의 처우가 바뀌는 노력을 하느라. 나 같은 것도 돌봐야하고.”

그 말은 어디까지나 치즈루의 동요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말이었다. 평소에는 자신의 한마디 한마디에 여러 반응을 보여주는 그녀가 치료에 관해서는 전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

오키타의 악의에 가득 찬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치즈루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띄우며 오키타를 바라볼 뿐이었다.


불만이 있으면 말하던가?”


하지만 오키타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지 그렇게 내뱉었다. 하지만 치즈루는 여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선 치료도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일단 이걸 원래자리에 두고 올게요. 약은 언제나처럼 오키타 씨의 방으로 가져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안 먹을 건데?”


소소한 반항을 해보는 오키타였지만, 치즈루는 그가 자신이 약을 갖고 오면 투덜투덜 대면서 먹어줄 거라는 걸 알기에 치즈루는 그저 방긋하고 웃을 뿐이었다. 콘도가 약도 잘 먹고 착한 아이로 있어야 한다.’ 라고 했기에 오키타도 어쩔 수 없이 치즈루가 가져온 약을 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걸까. 오키타는 크게 한숨을 쉬고 치즈루에게 빨리 나가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그런 그에게 실례합니다, 라고 살짝 목례를 한 치즈루는 치료도구가 든 바구니를 든 채 히로마를 나섰다.

복도를 걷고 있으면 저 멀리에서 헤이스케에게 훈련을 받고 있는 대사들의 구령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잠시 멈추어 듣고 있던 치즈루였지만, 곧 이럴때가 아니라며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우가 바뀌는 노력이라.’


그의 말대로, 지금 치즈루는 이것저것 노력을 했기에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입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케다 야 사건 때. 치즈루는 산난의 명으로 야마자키와 함께 목숨을 걸고, 다리가, 폐가 찢겨져나갈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면서 시고쿠야에 있는 대사들에게 전언을 전하고, 이케다야에 들어가 부상을 대사들을 옮기는 것을 돕고, 전투가 끝난 후에는 코우도에게 배운 지식과 그가 치료하는 방식을 본 기억을 총동원해서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그 후, 피가 잔뜩 묻은 대사 복을 세탁하고 수선하는 등 싸움이 끝난 후에도 이것저것 많은 노동을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조금씩 인정해주기 시작 한 것은. 그 사실을 자각 한 것은 이번 아이즈 번()에서 출동이 내려졌을 때 간부들에게 너도 참가할래?’라고 권유받았을 때였다.

하라다는 상냥하지만 매사에 냉정하고 정에 그렇게 쉽게 휩쓸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만약 그가 치즈루가 쓸모없다고 판단했다면 그렇게 권해주지는 않았겠지. 게다가 치즈루의 합류를 원한 것은 하라다 뿐만이 아니었는지 사이토도 그녀의 합류에 찬성한다는 듯이 치즈루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건 그들이 치즈루의 존재를 인정해주었다는 것으로 봐도 좋은 것이겠지. 자신이 없다는 듯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치즈루는 정원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슬슬 돌아오실 때가 되었지. 다들.’


누군가가 전령으로 와주지 않는 한 출진한 신선조가 어떻게 되었는지 둔소에 있는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산난 씨는 슬슬 야마자키 씨가 올 거라고는 했지만.’


어제 저녁 식사를 할 때 산난이 싸움이 슬슬 끝날 때가 되었으니 야마자키 군이 오겠군요.’ 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은 즉 저쪽의 싸움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떻게 알 수 있냐는 치즈루의 말에 그는 그저 평소의 미소를 지으며 단순한 감이라 대답했지만, 그 자리의 그 누구도 산난이 감 따위에 의지해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치즈루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산난의 말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을 수 있었다.


………야마자키 씨라.’

 

[ 나는 감찰반으로서 당신을 신용하지 않아. 그게 나에게 내려진 임무다. ]

 

예전에 둔소에 고양이가 들어와 모든 것을 휘젓고 다니던 사건이 있었을 때, 야마자키는 치즈루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신용 받지 못하는 관계. 감시받고 감시하는 관계. 그것이 현재 치즈루와 야마자키의 관계였다.


그 분도 조금은. 날 신용해주실까.’


머리로는 잘 알고 있다. 그가 감찰반이 아니라도 야마자키는 치즈루를 신용 할 수 않을 것이고, 신용할 생각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거기까지 생각한 치즈루는 바보 같아, 라고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며 생각을 떨쳐내듯이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환경이 바뀐 탓일까. 자기도 모르게 옛날에 다짐한 것들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 같았다.


……괜찮아.’


그래, 괜찮다. 그렇게 자신에게 되내이며 치즈루는 고개를 숙였다.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아. 인정해주시지 않아도 괜찮아. 원래부터 그래왔으니까.’


에도에 있을 때부터 치즈루는 그래왔다. 누구에게 인정받기 위해, 좋게 보여 지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바라지 않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만을 하면 된다. 라고 코우도에게 배워왔기 때문이었다.


[ 절대 무언가가 돌아올 것을 바라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선을 긋고 행동하렴. ]


물론 처음에는 어째서 그래야하는 것인지 몰랐다. 그래서 계속해서 질문을 해보았지만 코우도는 네가 좀 더 자라면 알 수 있을 것이라며 대답을 회피했다. 왜 대답을 알려주지 않은 것인지, 왜 코우도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치즈루가 조금 더 성장했을 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틀린 무언가가 있다.


그것도 크게 알려지면 평화롭게 살 수 없는 무언가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치즈루는 그제서야 코우도의 말을 이해했다. 절대 남에게 무언가를 바라지 말고, 일선을 그은 상태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전력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특별해지는 일은 없어야 하고, 될 수 있는 남과 선을 그으면서 살아야 한다. 그것 외에 자신이 평범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어린 치즈루는 그렇게 깨달아버렸다. 그리고 그 생각은 성장한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장소만 바뀌었을 뿐이야. 괜찮아.’


에도의 진료소에서, 쿄의 신선조의 둔소로. 장소만 바뀌었을 뿐이다. 물론 불안하고, 신선조의 비밀을 알아버린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치즈루 본인도, 간부들도 모른다. 치즈루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자신이 할 수 있은 일을 하며 코우도를 찾는 것. 그것뿐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내뱉더니, 힘내자, 라고 중얼거린 치즈루는 바구니를 꼭 껴안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유키무라 군.”

???!!!!”


생각을 가다듬고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으면, 갑자기 누군가가 치즈루의 뒤에서 말을 걸었다. 그러자 치즈루는 새파래진 얼굴로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바구니에 들어있던 약들과 붕대와 도구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불쾌한 소리를 냈지만, 치즈루는 그걸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식은땀을 흘리며 그 자리에 정지해 있었다.

산난은 이 앞의 방에, 나머지 대사들은 헤이스케와 함께 중원에, 그리고 오키타는 히로마에 있을 것이다. 간부의 방은 이 앞에 있으니 아직은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순간 그 날 밤 일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하얀색 머리에, 붉은 눈의 괴물. 마치 미친것처럼 피만을 찾아 쫒던 괴물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치즈루는 필사적으로 그건 아니라고 부정했다. 그들은 말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아니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자신을 안심시키며 치즈루는 지금이라도 튀어나오고 싶다고 주장하는 심장을 억누르기 위해 왼쪽 가슴팍을 꽉 누르며 뒤를 바라보면, 그곳에는 치즈루의 머리에 한 순간 떠올린 하얀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괴물이 아닌, 갈색머리에 청록색의 기모노를 입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짧은 앞머리와 달리 그의 뒷머리를 길게 아래로 늘어져 있었지만, 그 머리카락을 꼬랑지처럼 단정히 묶었기 때문일까. 왜나 깔끔한 인상을 주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의 보라색 눈동자와 날카로운 눈매 때문일까. 깔끔하다는 이미지보다는 냉철하고 날카로운 인상을 주고 있었다.


“-야마, 자키. .”

항상 치즈루를 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그였는데, 치즈루의 비명에 놀란 탓일까. 야마자키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놀랐다는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 미안하다. 유키무라 군. 그렇게 놀랄지 몰랐어.”


치즈루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야마자키도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평소답지 않게 말을 더듬으며 입을 열자, 치즈루는 여전히 새파란 얼굴로 두 손을 내저었다.


, 아뇨, 아뇨. 괜찮아요. 저야말로 놀라게 해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야마자키 씨.”

아니, 나도 무턱대고 말을 건 잘못도 있어. 미안하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어서 그럴까. 치즈루의 얼굴색이 조금은 나아졌다. 그 모습을 본 야마자키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 아뇨! 제가 멍하게 있던 게 문제인 걸요! 저야말로 갑자기 비명질러서 죄송해요!”


다른 생각에 집중하고 있던 탓에 야마자키가 오고 있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자신이 나쁘다. 두 손을 모아 허리를 굽히며 치즈루가 계속해서 사죄하자, 야마자키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그럴 필요가 없다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 아냐. 내가 무의식적으로 발소리를 죽인 탓이야. 방금 전 토도 조장에게도 기척지우지 말라고 한 소리 들었고. 미안하다. 이후론 조심하지.”

, 아니에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오히려 제가!”


만약 이 곳에 오키타가 있었다면 너희들, 뭐해?’ 라며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태클을 걸 정도로 두 사람은 그 상태로 끝나지 않는 사죄의 주고받기를 하고 있었다. 몇 초 뒤 그 사실을 깨달은 야마자키가 여기까지 할까, 라며 쓴웃음을 짓자, 치즈루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네. 그러도록 해요. 라며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 야마자키 씨. 어째서 여기에...? 혹시 전령 역으로 오셨나요?”


치즈루의 질문이 이외였기 때문일까. 야마자키의 눈동자가 순간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을 뿐,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미안하단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 , 미안하다. 유키무라 군. 솔직히 나는 유키무라 군이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 얕봐서 미안하다.”

?”

내가 전령으로 왔다는 걸 모르고 나를 보면 바로 다른 분들은요? 라고 다른 분들을 찾으실 거라 생각했거든. ...지금 생각해보면 이건 네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무시하는 생각이었어. 미안하다.”


, 그는 그녀가 전장의 체계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을 거라 멋대로 얕잡아보고 있었다는 것을 사과하고 있는 것이다. 예상치도 못한 사죄에 치즈루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푸후스 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일까. 야마자키가 당혹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치즈루는 웃음을 진정시키며 죄송해요, 라고 작게 사과하며 이유를 입에 담았다.


방금 사과하지 말자며 결론지었는데 또 사과하셔서. 후후.”

………그것에 대해서 사과, 아니. 사과하면 안 되지. 하지만 제대로 사과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너는 이제 감시만 받는 입장이 아닌데다 우리들의 뒤에서 이것저것 도와주고 있는 입장이니까. 그런 네가 아무것도 모른다, 무지하다, 라고 생각하는 방식이 틀린 거야. 너를 인정하지 않는 거니까. 그러니까 이것만큼은 사과하게 해줘. 미안하다. 유키무라군.”

인정하지, 않는 것.”

유키무라 군?”


야마자키의 말에 치즈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정답이겠지. 실제로 그 한마디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기 때문일까. 급히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은 치즈루는 얼른 또 다시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방금 전의 자신의 말을 얼버무렸다.


정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저도 산난 씨에게 들어서 야마자키씨가 전령으로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 뿐이고!”

, 그런가.”

!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실제로 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자신의 무지를 강조하듯이 두 주먹을 꽉 쥐며 말하자, 이번에는 야마자키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웃음이 전염되기라도 했을까. 치즈루도 다시 쿡쿡하고 웃기 시작했다.


참고로 전부 끝났다. 일단 간부들도 상처 하나 없이 전부 무사하시다. 물론 부상자가 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자세한 건 산난 총장에게 보고 하는 것을 들어주길 원한다만…….”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모두가 무사하다는 소식에 치즈루의 표정이 화악하고 밝아졌다. 부상자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모두가 무사하다는 것이 어디인가. 안도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착각이라는 것은 알지만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을 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으면, 갑자기 야마자키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그렇지, . 이라고 중얼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유키무라군. 평 대사들과 무슨 일 있었나?”

?”

방금 전 말했듯이 이 곳으로 올 때 평대사들이 있는 중원을 통해 왔다만. 거기서 다들 유키무라 군에 대해서 대화하고 있었거든. 무슨 일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싶긴 했지만 전부 듣기 전에 토도 씨와 만나서 제대로 못 들어서 말야. 혹시 무슨 일 있었나?”


야마구치의 말에 치즈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평 대사들과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짐작 가는 것이 전혀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방금 전 부터의 일부터 거슬러 올라간 덕분일까, 치즈루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 아마도 카와구치 씨. 때문일지도?” 


방금 전 히로마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자, 야마구치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예전에는 다들 갑자기 굴러들어와 방 한 켠을 차지한 치즈루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들 뒤에서 험담을 하건 했다. 간부들의 영향 덕분인지 다행히 폭력이나 노골적인 괴롭힘은 받지 않았지만, 적의가 섞인 시선을 받는 것은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케다야 사건 때의 공적과 평대사들을 치료해준 것 덕분에 인식이 꽤나 바뀐 듯 했다.


저쪽에서 부상자가 발생했을 때 다른 평 대사들도 유키무라 군이 있어주었다면, 이라고 이야기하던 걸 들었다. 여기에 녹아들어서 정말 다행이야. ”

야마자키 씨.”

노력했구나. 유키무라군.”


안도했다는 듯이 미소 짓는 야마자키와 달리, 치즈루는 복잡한 표정을 띄우며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너도 참 힘들겠네. 자신의 처우가 바뀌는 노력을 하느라.

-노력했구나. 유키무라 군.


 

순간 오키타와 야마자키의 말이 겹쳐 들렸기 때문일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치즈루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 물론 오키타와 달리 야마자키는 치즈루를 칭찬해주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왜 그 말에 이렇게 반응해버리는 걸까. 이래서는 안 된다. 야마자키를 곤란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니까 평소처럼 감사합니다, 라고 웃으며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고개를 들어 미소를 만들지 않으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는 듯이 고개를 든 치즈루의 시야에는 당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야마자키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유키무라 군.”

, 아뇨! 괜찮아요! 잠시 멍하게 있었던 것 뿐이에요! 그보다 괜찮으세요? 산난 씨에게 가는 도중이었던 것은...”


자신 때문에 꽤나 시간이 지체되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해보았지만, 야마자키는 고개를 저으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확실히 산난 총장에게 가야하지만. 조금 정도라면 괜찮겠지. 게다가 그런 표정을 짓는 널 내버려두고 그냥 가기에는 너무 신경이 쓰여서 말야. 둔소 내부의 싸움을 중지하는 것도 내 임무중 하나고.”

, 싸움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치즈루에게 변명할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야마자키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본능적인 감 덕분일까, 치즈루는 그가 자신이 제대로 말할 때까지 이 곳에서 꼼짝하지 않겠다는 것을 알았다. 치즈루의 성격상으로 자신 때문에 일이 늦어지는 것에 대해 죄악감을 가질 테고, 그러면 마지못해 이야기를 하겠지. 치사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지금 치즈루는 그에게 숨길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분명히 잠시만의 침묵이었을 텐데, 치즈루에게는 정말 오랜시간으로 느껴졌다. 그 침묵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일까. 치즈루가 각오를 다졌는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심조심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오키타 씨에게, 들었어요. ‘처우가 바뀌는 노력을 하느라 고생이 많네하고.”


당시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의외로 자신은 그 한마디에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자각한 치즈루는 입술을 한번 깨물고선 말을 이어갔다.


제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시작한건, 언제 살해당할지 모르는 공포를, 잊기 위해서, 였어요.”


사람 베는 집단이라 불리는 신선조. 그 악명은 치즈루의 고향인 에도에서도 소문이 퍼져있었다. 그 악명 높은 집단의 비밀을 알게 되고, 그들의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은 채 초반의 치즈루는 방구석에서 떨며 지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몸은 그때의 공포를 잊지 못한다는 듯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든 일어서기 위해 택한 것이 바로 가사일 이었다. 그나마 이야기가 통할 것 같은 이노우에에게 허락을 받고 자신에게 주어진 방을 청소했을 때, 깨끗해진 방을 본 치즈루는 경 자신의 이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복도를 청소하고, 바느질을 하고, 요리를 하면서 치즈루의 정신상태는 안정되어갔고, 지금은 에도에 있었을 때만큼 안정되었다. 물론 이 행동이 자신을 잘 봐달라고 아양을 떠는 것으로 비추어진다는 것은 먼 옛날부터 뼈저리게 자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무서움만을 없애기 위해 가사 일을 열심히 했으나, 헤이스케의 그런 것을 해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이 행동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다른 의도로 비춰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이것이 자신이 이 장소에서 호흡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물론 지금은 신선조의 여러분께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분명히 있어요. 하지만, 제가 가사 일을 시작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보신(保身)을 위해서였으니까. 오키타 씨의 말이 맞는 게 아닌가, 생각해서. 그래서. ”


그래서 야마자키의 말에 죄악감이 스멀스멀 올라온 것이다. 하지만 그 한마디는 입에 내뱉기 힘들었는지, 치즈루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고개를 들더니, 야마자키를 향해 억지웃음을 지어보았다.


고맙습니다.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누군가에게 털어놓았더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어요.”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과 진심으로 고마움을 담아 치즈루가 고개를 숙였다. 여러 가지 일로 인해 바쁜 그가 이렇게 자신에게 신경써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도 고마움과 죄악감이 들었다. 그래서 얼른 산난에게 가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유키무라군.”


얼른 이야기를 끝내고 싶어 하는 치즈루와 달리, 야마자키는 아직 그녀와 이야기를 끝낼 생각이 없다는 듯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한순간 겁을 먹었는지 치즈루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그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야마자키는 한 순간 말을 하는 것을 망설였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행동은 동기가 어찌되었건 신선조의 도움이 되고 있어. , 빨래, 수선, 청소, 그리고 나와 함께 의료활동까지 해주고 있지. 게다가 너는 다른 대사들과 다른 시점을 갖고 있기에 우리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데다, 그 점을 이용해 우리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은 부장도 국장도 아시는 일이다. 게다가. 자신의 보신을 위해서 일을 시작했기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너는 그랬지만, 나는 별로 그 점에 대해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본다만.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생각해.”

……?” 


야마자키의 대답이 의외였기 때문일까. 치즈루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선 그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유키무라 군이 우리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유키무라 군이 우리들에게 신뢰를 심어줄 수 있는행동을 해줬기 때문이야. 물론 네 입장은 변하지 않고, 아직 너를 경계해야하지만. 그래도 만약의 날이 올때까지는 유키무라 군이 평온하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물론 나만의 생각은 아냐. 국장도, 부장도, 다른 간부들도 그렇게 생각하시분이 많아.”

야마, 자키 씨.”

유키무라 군. 자책감 가질 필요 없어. 지금 이 상황은 너에게 주어진 보상일 뿐이야. 보상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혹시 그래도 네가 자신의 노력에 쓸모없는 죄악감을 갖는다면, 내가 몆번이던 말해주지. -애썼어. 노력해줘서 감사해. 유키무라 군.”


그 말과 함께 야마자키가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치즈루는 손을 내저으며 그에게 고개를 들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걸 막으려는 듯이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서 눈물이 투두둑, 하고 떨어졌다.


, 어어어?”


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야마자키의 말에 무언가가 끊어졌는지 계속해서 그녀의 뺨을 타고 후두둑하고 떨어져 내려갔다.


, 어어.., 죄송해요. 울 생각, 전혀, 없었는, .”


어떻게 해서든 눈물을 멈추려고 노력을 하며 치즈루가 계속 사과를 입에 담았다. 손으로 훔치고 손으로 닦아도 눈물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자 치즈루는 계속해서 죄송해요, 죄송해요라고 똑같은 말만 반복하며 한쪽 손을 내저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 야마자키가 손수건을 쥐어주자, 치즈루는 처음에 당황하며 괜찮다고 하려고 했지만 야마자키가 가져가라는 듯이 꼭 쥐어주자 조심조심 그것을 받아 얼굴에 가져가 대었다.


조금은 진정 됐나?”


그 손수건에 얼굴을 묻은 채 어떻게든 울음을 멈춘 치즈루가 조심조심 고개를 들자, 거기에는 약통들을 제대로 바구니에 넣고선 정리하고 있는 야마자키의 모습이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이 방금 자신이 떨어트려버린 의료기구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치즈루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버렸다. 자신의 일인데 그가 하게 만들어버렸다. 그것에 대한 미안함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오려던 차에, 야마자키가 괜찮다는 듯이 씁쓸하게 웃었다.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내가 말만 걸지 않았어도 떨어트리는 일은 없던 것이었으니까.”

, 그래도! 죄송합니다! 야마자키 씨! , 손수건도, 빨아서 다시 돌려 드릴께요!”

아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래도-”


안되겠다. 이대로 가다간 다시 한 번 끝나지 않는 대화가 이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대화를 끝낼 방법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혼란스러운 머리로 치즈루가 무어라 입을 열려는 순간-.


끼야아아악!!!!!!!!!!!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토도 조장!!”

시끄러! 이것도 못 버텨서 어떻게 싸우려고!!!!!”


저 멀리서 카와구치의 울음 섞인 목소리와 헤이스케의 호통이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헤프닝에 야마자키와 치즈루는 놀란 표정으로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며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곧 동시에 푸웃, 하고 작게 웃기 시작했다.


……앞으로 유키무라 군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그렇게 얼마나 웃었을까.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간 야마자키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다. 앞으로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그저 감시 대상이었던 치즈루가 다른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는다는 것은 그 당시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앞으로 치즈루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상태를 유지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일이 틀어져서 살해당할 수도 있다. 치즈루도 그 사항을 잘 알고 있는지 두 손을 모은 채 그저 그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 그때의 그 눈이다.’

 

[너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어. 그래도 괜찮다면 부디, 나를 따라와 줬으면 해.]

 

야마자키의 눈을 본 순간, 치즈루는 예전의 이케다 야 사건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날 밤 자신에게 부탁을 하던 그 눈이다. 그 눈에서 자신에게 해를 입히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일까. 치즈루는 그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야마자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감찰반이라는 입장에서 유키무라 군을 의심하지 않으면 안 돼. 그래도 네 처우가 좋아지는 방향으로 노력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

 


[ 나는 감찰반이라는 입장 상 당신을 신용하지 않아. 그것이 나에게 내려진 임무니까. 하지만, 나 스스로 당신의 적이 될 생각은 없어. ]



그 말에 치즈루는 방금 전에 떠올렸던 신선조 둔소에 고양이가 들어왔던 사건을 떠올렸다. 그 때와 비슷한 말이었지만, 의미는 확연히 달랐다.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보상이라는 것일까. 그에게 무어라 말 하고 싶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보라색 눈동자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치즈루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니 나도 지금 이상으로 코우도 씨의 탐색에 힘을 쏟아보려 한다. 하지만 역시 나 혼자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어. 그러니까 내가 빠트린 부분을 유키무라 군이 메워줬으면 해. -부탁합니다.”


야마자키가 고개를 숙였다. 그때와 똑같이 마지막은 정중하게 부탁한다는 듯이 존댓말로 바뀌었지만, 현재 야마자키의 인식은 그때와 확연히 달라져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해서 고개를 숙이는 야마자키의 모습에 한동안 사고가 정지한 치즈루였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모은 채 입을 열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주세요. 저는 여러분의 힘의 되고 싶으니까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치즈루도 야마자키와 똑같이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가 말하는 내가 빠트린 부분이라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부상자의 치료와 코우도의 수색관련이다. 감찰반의 일로 둔소를 자주 비우는 야마자키와 달리 치즈루는 이 둔소에 계속 있을 테고, 그렇다면 야마자키가 없어도 대사들의 치료를 맡길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코우도를 몇 번밖에 만나지 않은 대사들과 달리 치즈루는 그와 함께 몇 년을 함께 해왔다. 그녀도 아무리 코우도가 변장을 하고 있어도 알아챌 수 있다고 그들에게 당당히 선언한 바 있었다. 그러니 대사들 보다 코우도를 발견 할 수 있는 확률은 치즈루가 높았다.


고마워. 유키무라 군.”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야마자키 씨.”


서로의 대답을 듣자 두 사람은 동시에 미소 지었다. 이 공기가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도 싫지는 않다. 그건 야마자키도 마찬가지였는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럼, 나는 산난 총장에게 보고를 올리러 이만 가봐야겠어.”


저 멀리서 대사들의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오자 야마자키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시간을 많이 지체했다. 그 사실을 인식한 치즈루가 죄송하다고 다시 고개를 숙이자, 야마자키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이건 내가 가는 길에 원래장소에 놔둘 테니까, 괜찮다면 유키무라 군은 산난 총장의 방으로 차를 가져와주지 않겠어? 그리고 된다면 오키타 씨와 토도 씨도 불러줬으면 해.”


원래 저 치료도구는 야마자키의 것이다. 그러니 내가 가져다두겠다며 보충설명을 붙이자, 치즈루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 ! 3잔이면 금방 가져갈 수 있어요!”


간부 전원의 차를 준비하는 것보다 시간은 빨리 걸릴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치즈루가 웃으며 대답하자, 야마자키는 아니, 라며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유키무라 군의 것까지 4잔 부탁한다.”

.”


그 말은 즉, 함께 전장의 보고를 들어도 된다는 의미였다. 산난이 예측으로 몇 가지 알려준 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지, 진실이 아니다. 전장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중요한 곳에 자신이 있어도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에 포기하고 있었는데, 지금 동석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치즈루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보자 야마자키의 얼굴에 미소가 더 깊어졌다. 마치 그녀의 미소가 전염된 것 같은 광경이었다.


, 손수건…….”

손수건은 나중에 깨끗이 세탁해서 가져다줬으면 하는데, 괜찮나?”

, !!!”


야마자키의 부탁에 치즈루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 모습을 여전히 미소를 띄우며 바라보던 야마자키가 슬슬 가보겠다고 하자, 치즈루는 얼른 두 사람을 불러올게요, 라며 꾸벅 고개를 숙이고서는 헤이스케와 오키타가 있을만한 곳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던 야마자키는 이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산난의 얼굴을 떠올리고 쓴 웃음을 짓더니,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그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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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카멜리스
2017. 2. 12. 02:04

 

너희들이 폼 나는 것’ ‘재미있어 보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크게 한숨을 내쉬며 아나바라는 눈앞의 문제아들을 바라보았다. 테루시마. 누마지리, 보바타, 이이자카, 히가시야마, 후타마타에, 오이카와에 히나타마저 아나바라의 앞에서 정좌를 하고 있었다. 현재 배구 부원들 중 살아남은 것은 리베로인 츠치유와 매니저인 미사키 뿐이었다.

2학년 6명 전부가 복귀하면서 배구 부는 부활할 수 있었다. 처음엔 간곡히 부탁해도 좋아, 라던가 고개를 끄떡여주지 않았던 그들이 갑자기 배구부에 돌아온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진 오이카와였지만, 히나타의 뭐 어때요, 다시 배구를 할 수 있게 되었는걸! ’이라는 한마디에 좋은 건 좋은 거지. 신경 쓰지 말자. 배구부도 부활했고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선배들이 돌아온 후로 배구 부는 그야말로 순조로웠다. 아니, 솔직히 무서울 정도로 순조로웠다. 감독인 아나바라와도 사이는 괜찮았다. 예전의 배구부일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배구부가 부활하고 나서 첫 부 활동 시간 때 자신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이 하고 싶은 배구는 무엇이냐라고. 그 질문에 대표로 테루시마가 말했다. 재미있고 즐거운 배구가 하고 싶다고. 그런 그들의 바램을 이루어주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그럴 예정이었던 것일까. 기초부터 새로 바꾸겠다고 지금까지의 연습내용도 싹 바꿔버렸다. 그 동안 학교가 고집해왔던 질실강건을 알게 뭐야, 라는 듯이 걷어차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지도하는 아나바라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2학년들도 진지하게 그의 지도에 따랐다.

2:2으로 이루어지는 짧은 시합. 2명에 익숙해져버려서 누군가가 해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세뇌같은 연습이었지만, 오이카와는 개인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안 된다고 생각한 오이카와는 감독에게 4:5도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2:2에 익숙해지면 시합에서 곤란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은 6:6을 원했지만 현재 9명인 배구부원들로써는 이게 한계다. 원래라면 4:4가 좋을 텐데, 9명이니 한명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한명을 리베로인 츠치유로 하는 것이 좋겠다며 아나바라와 상담했다.

그리고 예전에 조센지와 시합했던 히나타는 부원들을 설득해 함께 전체시합을 해보자며 오이카와가 이야기했던 메뉴의 추가를 발의했고, 모두가 찬성해서 그 메뉴는 오늘부터 정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4:5로 하는 경우에는 세터를 기준으로 해서 후타마타 팀과 오이카와의 팀으로 나누기로 했다. 개인 연습과 플라잉 연습을 하고, 남은 시간은 4:5를 하고 끝내자는 감독의 말에 오이카와는 만족하며 다른 부원들과 함께 플라잉에 몰두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아나바라가 화장실에 가겠다며 자리를 비우자 테루시마가 이걸 해보자, 라고 유0브에서 배구영상을 보여주었고, 그걸 따라하다가 아나바라에게 걸려 지금 이렇게 혼나고 있는 것이다. 츠치유는 무섭다면서 하지 않았고, 미사키는 매니저니까 참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좌라는 이름의 처벌에서 벗어나 있었다.


기술을 따라하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멋있다는 이유로 기본을 소홀히 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어. 내가 뭐라고 했지?”

“2:2연습을 하기 전까지는 플라잉연습만 하라고. 하셨죠.”

플라잉은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꼭 해야 하는 훈련이라고, 내가 사전에 설명했지? 그걸 게을리 해서 어쩌자는 거야.”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아나바라의 말에 반박도 하지 못한 채 테루시마는 이리저리 눈동자만을 굴리고 있었다. 현재 이 배구부에 초보자는 없지만, 상급자 레벨에 있는 것은 오이카와 한명 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이카와 외에는 오합지졸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그것은 2학년들도, 히나타도 잘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다물고 있는 2학년들을 바라보던 아나바라는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재미없겠지만 한동안은 이 플랜으로 간다. 너희들은 기본기가 너무 부족해. 멋진 기술을 쓰고 싶어도 기본기가 잡혀있지 않으면 금방 무너지고, 다칠 확률이 높아진다. 적어도 이 정도면 다치지는 않겠지, 라고 판단했을 때 너희들이 갖고 온 기술을 익히는 것에 최대한 도움을 주마. 이 정도가 내가 너희들에게 양보해줄 수 있는 수준이다.”

…….”


아나바라는 그다지 고압적이지 않은 감독이었다. 엄격하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무언가를 할 때 부원들의 의견을 묻는 일이 많았다. 그는 논리적이었고, 사람을 설득 하는 것이 몸에 배여 있는 남자였다.


반성하나?”

…….”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잔뜩 풀 죽은 목소리로 테루시마가 고개를 끄떡였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알고 있다. 히나타도 알고 있다. 미사키도 알고 있다. 다른 부원들도 알고 있다. 저것은 연기라는 것을. 아나바라가 눈을 땐 순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서 아까전의 그것을 다시 해보자고 할 것이라는 것을. 그 증거로 설교가 끝나고선 바로 이이자카에게 어제 그것도 나중에 따라 해보자, 라고 말을 걸고 있었다.


정신 못 차리지.


이이자카의 말에 공감이라는 듯이 오이카와가 고개를 끄떡였다. 다행히 아나바라는 테루시마가 아직도 못된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는지 미사키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던 오이카와는 정좌를 한 탓에 저려오는 다리를 이끌고 4:5 연습시합을 하기 위해 지정된 코트로 향했다.


. 치비 짱. 이쪽 팀이었어?”


그리고 그곳에는 오이카와처럼 다리가 저리는 것인지 다리를 덜덜 떨고 있는 히나타가 서 있었다. 배구부에 들어오고 나서 많이 정좌를 해보았지만 여전히 정좌에 익숙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물며 이곳은 체육관. 딱딱한 마룻바닥 탓인지 다리가 더 빨리 저려오고 지속시간도 길다. 찌릿찌릿한 감각을 털어내듯이 다리를 흔들흔들 거리고 있으면, 히나타가 오이카와의 다리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아아-! 대왕님!!!”

, ! 무슨 소리이려나!! 오이카와 씨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다리 저린 것은 치비 짱 뿐인 걸-!”

히나 짱은 아무 말도 안했어. 안 그래? ‘대왕님?’’

맞아. 너무 히나타를 의식하는 거 아냐? ‘대왕님?’”

, 그러니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요!”


네트 너머에서 기분 나쁘게 웃고 있는 테루시마와 이이자카에게 쏘아붙이듯이 오이카와가 항의해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선배들의 비웃음이었다. 선배들이 오이카와를 대왕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히나타가 그렇게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히나타에게 오이카와를 왜 대왕님이라 부르는 거냐, 라고 누마지리가 물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코트의 왕이라고 불리는 카게야마의 선배니까 대왕님이요.’라고 히나타가 솔직하게 대답하기 전에, 오이카와가 웃는 얼굴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 세계에도 카게야마는 있다. 키타이치에서 최고로 뽑히는 세터라고는 하지만 그는 오이카와와 히나타와 동갑이라고 되어있다. , 오이카와가 그의 선배가 되는 것은 이상하다. 이 아이는 왜 바보같이 그걸 정직하게 말하려는 걸까나. 얼굴에 살짝 사거리마크를 띄우며 그를 내려다보면, 히나타도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제대로 된 변명거리를 만들어놓았다고 했다. 물론, 그 변명은 듣는 순간오이카와는 기각해버렸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때 있었던 일로 선배들은 오이카와를 히나타를 따라 대왕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히나타와 다른 점이 있다면, 히나타는 선배라는 말 대신 대왕님이라고 부르고 있었고, 다른 선배들은 오이카와를 놀리기 위해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머리가 아프다. 이 사단의 원인인 히나타를 노려보았지만 그에게 무어라 해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오히려 히나타의 변명대로였다면 선배들에게 이렇게까지 놀림 받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히나타의 입을 막은 자신을 저주하고 있으면, 어느새 4:5 연습시합이 시작 되었다.


여전히 이 사람들은 종잡을 수 없다니까.’


배구부가 아니라 다른 부와 경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계속 예상치 못한 곳에서 공격이 들어오고, 룰에 위반되지 않는 한에서 모든 수단을 끌어내 공을 띄우고 있었다. 리시브가 어떤 형태던지 어떻게든 띄우면 된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실제로 그렇게 처리하고 있었다. 이거라면 못 잡겠지, 라고 한 공격도 발로 막거나, 얼굴로 막거나 하는 걸 보면 임기응변이 뛰어나다는 말만으로 그들을 표현하기에는 어려웠다.

어떻게든 공을 띄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에 달려들고 있다. 그 모습에 오이카와는 마음이 뛰었다. 공격도 수비도 그럭저럭 이지만 승리에 관한 마음은 강하다. 그 모습이 오이카와를 점점 불타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치비 짱이랑 비슷한 플레이란 말이지…….’


움직임이 큰 탓일까, 자주 상대의 술수에 넘어가는 바람에 점수를 빼앗기고 있다. 리베로를 제외한 모두가 자신은 미끼라는 듯이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읽기 어려운 움직임으로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미끼로써는 우리 치비 짱이 최고지!’


오이카와가 씨익 웃는 것과 동시에 히나타의 공격이 들어갔다. 시라토리자와 전이 끝나고 무얼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히나타의 실력이 그때보다 늘었다. 어떤 일을 했기에 공의 흐름을 읽을 수 있게 되었는지 묻고는 싶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아마도 예전에 무심하게 물었던 그 한마디에 대해 반응했던 히나타의 모습이 트라우마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물을 때까지는 히나타의 실력이 늘었다는 사실만을 순수하게 기뻐할 생각이었다. 덕분에 카게야마와 하는 속공보다는 덜하지만 그것과 비슷한 속도와 느낌의 속공도 쓸 수 있게 되었고, 오이카와도 이것저것 새로운 걸 배울 수 있었다.


새로운 무기를 손에 얻었다는 것이 이런 느낌인가.’


물론 그 동안 오이카와가 속공을 써보지는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히나타와 하는 속공은 색달랐다. 좀 더, 좀 더 정밀하게, 좀 더 세세하게, 좀 더 빠르게. 그동안 이 공을 받아줄 사람이 없었기에 오이카와는 이것보다 더 빠른 속공을 연습하지 않았다. 하지만 히나타와 함께 싸우려면 자신이 하던 토스보다 더 정밀하고 더 빠른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이 드디어 틀이 잡혔다.

히나타가 달려가는 곳을 확인하고, 오이카와가 그쪽으로 공을 토스했다. 카게야마처럼 히나타의 손에 딱 명중하는 토스는 하지 못하더라고, 그가 있는 곳으로 공을 보내면 그는 반드시 쳐준다. 처음에 그렇게 약속했고, 히나타는 될 수 있는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공을 상대방의 코트에 꽂아 넣었다.

그래, 지금처럼.


-!!! 니들 속공 진짜 반칙이야!!! 저번보다 더 명중확률 올라간 거 아냐???”

그만큼 더 연습한 결과겠지. 본받으라고. 선배.”

그래. 그거 네 공이었어. 1학년들에게 지지 말라고. 선배.”

확 감독님에게 이른다~선배.”

아 진짜 너희들 너무 싫어!!”


자신을 몰아세우는 후타마타와 히가시야마와 이이자카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테루시마였지만, 두 사람은 꼴좋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너희들, 나랑 같은 팀! 그렇게 분개하는 테루시마에게 알겠다고 대강 대답을 하는 선배들을 보며 오이카와는 어째서인지 데자뷰를 느꼈다.


왠지 3학년 때의 나를 보는 듯한…….’


하나마키와 이와이즈미와 마츠카와가 아마도 저런 느낌으로 자신을 갈궈 댔었던 것 같다. 왠지 모를 그리움을 느끼며 네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면, 뒤에서 누마지리가 툭, 하고 오이카와의 등을 쳤다.


확실히 늘었어. 오이카와. 처음에는 히나타의 얼굴에 공을 맞추건 했잖아. 그거에 비하면 많이 늘은 거지.”

, 그건 잊어주세…….”

아니지 아니지. 히나짱이 코피까지 터트렸는데 그걸 그냥 잊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안 그래-?”

! 전 괜찮은데!!!!”

아냐 아냐. 치비 짱. 내가 제대로 못해서 그런 거야. 그건.”


처음 2:2를 시작할 무렵은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그나마 나아진 편이었지만, 공이 히나타의 얼굴을 강타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계속 그의 손을 튕겨서 날아가는 일도 많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왜냐하면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아니었으니까. 카게야마처럼 정밀하게 공을 보낼만한 실력이 없었으니까.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계속해서 실수를 하는 자신을 마주할 때마다 울고 싶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은 대체 어디서 나왔던 것일까. 그 당시에는 발 밑이 차가워지는 감각을 몇 번이나 느꼈다. 그렇다, 다시 절망의 바다에 잠겨져가는 감각이다. 하지만 그 곳에서 오이카와를 끌어올려준 것은 히나타의 한 번 더라는 외침이었다. 코피가 나도, 계속해도 실패해도, 히나타는 계속 한 번 더, 라고 토스를 올려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 외침에 얼이 ᄈᆞ진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토스를 올렸지만 여전히 실패했다. 하지만 히나타는 전혀 개의치않고 다시 토스를 요구해오고 있었다.

그런 차가운 곳에서 절망하고 있을 시간은 없어. 그럴 시간에 이리 와서 나에게 토스를 올려줘라고 강압적인 모습을 보이자, 오이카와는 어이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에게 토스를 올렸다. 그가 계속 토스를 올려달라고 말할 때마다 차가운 곳에서 벗어나는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연습하고 개선하고 다시 연습 한 결과, 카게야마에겐 미치지 못하더라도 납득 할 수 있는 형태의 속공이 나왔고, 이젠 그걸 제대로 쓸 수 있는 레벨까지 왔다.


보바타!!! 대와아앙님! 나이스! 역시 대왕님!”

역시 대왕님! 나이스!!! 보바타 대단해!”

마지막 토스 정말 치기 쉬웠어! 대단해, 대왕님!!!”

대왕님이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제발!!!!”


보바타의 마지막 스파이크로 인해 4:5 게임은 오이카와 팀의 승리로 끝났다. 후타마타 팀에서는 다음에는 두고 보자는 패자의 말이 들려오고, 오이카와의 팀에서는 오이카와가 그건 칭찬이 아니에요, 칭찬 좀 해주세요! 라는 절규만이 들려왔다. 분명히 그들은 칭찬을 하는 것이 확실할 텐데, 대왕님이라는 단어가 붙으니 욕을 듣는 것 같다. 절규하는 오이카와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일부러 그러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오이카와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나이스라고 외치며 하이 파이브를 원하는 듯이 두 손을 높이 올린 채 자신에게 쪼르르 달려오는 히나타를 원망스럽다는 얼굴로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그의 관자놀이를 주먹을 쥔 검지의 마디로 꾹꾹 누르며 비틀어주었다. 아프다며 소리를 지르는 히나타의 목소리 따윈 현재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히나타에게 이 울분을 풀고 싶었다.


시끄럽다!! 거기!!! 얼른 뒷정리 해!!!”


하지만 아나바라의 호통과 함께 오이카와의 분풀이는 중지되어버렸고, 히나타는 그대로 선배들에게 끌려가 아팠지, 오구오구’ ‘대왕님이 정말 나빠’ ‘대왕님이 나빴네라고 위로당하고 있었다.

우와, 짜증나.

같은 후배인데 왜 취급이 다른 것인지. 처음엔 불만이었던 오이카와였지만 바로 이유를 알아채고 억지로 납득했다. 자신은 까기 좋은 후배, 히나타는 귀여워하기 좋은 후배다. 왜냐하면 히나타는 친화력이 높은 타입이었으니 말이다. 사소한 것도 자신이 멋지다고 생각하면 그 것을 솔직하게 눈을 빛내며 그렇게 주장한다. 그리고 말도 잘 들어주건 했다. 무엇보다, 히나타는 남을 대할 때 거짓으로 대하는 일이 드물다. 마음속 깊은곳에서부터 상대방을 존경하고 대단하다고 느끼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웬만큼 성격이 비뚤어진 녀석이 아니라면 쉽게 그와 친하게 될 수 있겠지. 안타깝게도 오이카와는 처음에는 툴툴거리다가 그에게 감화된 타입의 인간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서브하는 법 가르쳐 주세요라고 눈치도 없이 다가오는 빌어먹을 후배에 비하면 100억 배는 귀여운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대왕님 대왕님! 최고였어요! 역시 대왕님은 대단해!”


방금 자신에게 화풀이 당했기 때문일까, 평소보다 두발자국 멀어진 채 눈을 빛내며 방방 뛰고 있는 히나타를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허탈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나 뛰어다녔는데 아직 방방 뛰어다닐 체력이 있다니. 얼마나 스테미너 괴물인 걸까. 코트 저편에는 지쳤다는 듯이 뻗어있는 테루시마와 후타마타가 있었다. 보바타가 여기 거대한 쓰레기가 있네, 라며 밀대로 쿡쿡 밀고 있는 걸 본 순간 봐선 안될 것을 본 듯한 기분에 오이카와는 다시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원래 세계에서는 접점도 없으니 절대 친해질 것이라 생각하지도 못했다. 물론 토스를 올려주고 싶다고는 생각했지만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미래는 역시 알 수 없는 법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떡였다.


치비짱도 꽤나 칠 수 있게 되었네. 대단해. 대단해.”

공중전이 제 특기니까요! 갈고 닦지 않으면! 하지만 대왕님이 더 대단해요! 이 곳에 공이 왔으면 하는 동시에 공이 날아오는데요!!!”

그래도, 토비오 짱의 토스가 더 낫잖아?”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왜 이런 말이 나와 버린 걸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히나타를 내려다보면 히나타의 얼굴에서도 표정은 사라져있었다. 또 말실수 해버렸다. 평소에는 안 그랬는데, 유독 이곳에 오고 나서 말실수를 계속 하는 것 같았다. 미안해. 라고 사과하기 전에 히나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왕님. 카게야마의 그 토스는 카게야마 밖에 올리지 못해요.”


히나타의 말에 오이카와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 말에 꽤나 동요한 모양이었다. 어째서일까. 지금 히나타가 말하는 것이 진실인데 어째서.


아니, 답은 알고 있어.’


하지만 그걸 인정하기 싫다. 어린아이의 생떼 같지만 인정하기 싫었던 오이카와는 일부러 머릿속에서 떠올린 그 답을 모른 척 하고 있었다.


“-라고, 예전에 스가와라 씨가 그랬어요.”

스가와라? 아아, 그 상쾌군인가.”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 그의 옛 선배이자 짜증났던 선수를 떠올리며 오이카와는 물을 꼴깍꼴깍 소리가 나게 들이켰다. 아마 카게야마보다 실력이 떨어져 주전 자리를 빼앗겼었던 선배, 이었었던가. 부정적인 이미지로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떻게든 열심히 생각해보려다가 왜 굳이 생각해내야 하는 걸까, 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는 도중에도 히나타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확실히 카게야마 녀석의 토스는 굉장해요. 원리나 기술은 잘 모르겠지만 슉하는 동시에 파악, 하고 공이 이쪽으로 오니까요! 그녀석이 그랬듯이 그녀석도 제가 있으면 최강이었어요. 하지만 그 속공은 이제 쓸 수 없어요.”

……….”

대왕님과의 속공이 카게야마와의 속공보다 더 좋다. 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어요.”


히나타의 솔직한 고백에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었다. 이게 계속 눈을 돌려온 답이다. 자신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토스실력으로는 카게야마를 이기지 못한다. 예전에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곳에 온 후로부터는 정신을 놓으면 그 시절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알고 있다. 그러니까 자신이 해야할 일은 하나. 그것은-.


그래도, 저는 이 속공을 최강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언젠간 대왕님이 올려줬던 토스로, 카게야마와 했던 속공을 넘어서고 싶어요!!”

나와의 속공이 토비오 짱의 속공보다 더 좋다고 말하게 해주겠. 으응?”


그들이 동시에 내뱉은 말은 달랐지만 의미는 같았다. 한 순간 서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기 위해 입을 다문 채 머리를 정리한 두 사람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동시에 씨익 웃었다. 서로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기뻤는지 오이카와도 히나타도 똑같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 둘이 뜨겁다는 건 알겠으니까 얼른 가서 밀대 가져와. 얼른 얼른 뒷정리하고 돌아가야지! 특히 오이카와! 너는 서두르지 않으면 기숙사 문 닫힌다!”

, !!!”


옆에서 밀대 질을 하고 있던 누마지리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째서인지 누마지리와 츠치유는 오이카와와 히나타는 사귀고 있는 거 아냐? 라는 의혹을 품고 있었다. 물론 부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두 사람은 오이카와와 히나타가 수상하다고 뒤에서 계속 수군거리고 있었다. 저번까지만 해도 쟤네들 사귄다. 라는 소리만 나와도 바로 대응한 두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지쳤는지 아아아, 그러세요. 그런가봐 요. 라는 대응을 하기 시작했다. 소문 좋아하는 아줌마 같은 제스쳐를 취한 채 이야기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을 지나쳐, 히나타와 오이카와는 창고로 들어갔다. 뒤에서 우리것도 좀 꺼내줘, 라고 주장하는 테루시마를 무시할 수 없던 오이카와는 크게 한숨을 쉰 뒤 히나타와 함께 선배들 몫의 밀대걸레를 갖고 나왔다. 어차피 내년부터 다시 후배로써 시작하면 똑같은 일을 당했을테니까, 라고 자신을 납득하고 있으면, 선배들에게 밀대걸레를 나누어주고 온 히나타가 오이카와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그래도 대왕님.”

?”


오이카와에게 걸레를 받으며 히나타가 입을 열었다.


, 처음에는 불안했는데. 대왕님이 있어주셔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히나타가 말하는 것은 속공에 대해서라고 생각하겠지만, 오이카와만은 히나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 세계에 자신이, 오이카와 토오루가 있어줘서 다행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속공 때문이겠지. 그냥 같은 처지에 있어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겠지. 라는 비뚤어진 생각이 순간 떠올랐지만, 그 무엇도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나도.”


그저 히나타의 주황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머릿속에 떠오른 말과 정 반대의 대답을 입에 담았다. 오이카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이 세계에 와서 불안하고, 막막하고, 제대로 배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저것 밀려오는 불안감에 떨고 있을 때 그는 짠하고 나타나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물론, 말 안 할거지만.’


오이카와는 자존심이 센 편이었다.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말로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너무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까. 정리를 하고 있던 미사키에게서 놀지만 말고 얼른 청소하라며 일갈을 날렸다. 그들에게 죄송하다고 큰 소리로 외치며, 히나타와 오이카와는 급히 걸레를 들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 * *


 

너희들. 이번 휴일에 뭐할 거야?” 


뒷정리가 끝나고 옷을 갈아입는 도중 달력을 흘깃 바라본 이이자카가 무심하게 내뱉자, 그걸 물어봐주기를 원했다는 듯이 테루시마가 손을 들고 외쳤다.


나나! 나는 친가로 돌아가서 밀린 게임 할 거야!!”

연습도 해야지.”

공부도 해야지.” 

니들이 언제부터 내 보호자였다고!!!”


기다렸다는 듯이 테루시마에게 맹공격을 가하기 시작하는 선배들을 먼눈으로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여전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좀 익숙해져야지. 살짝 두통이 오는 것 같은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고 있으면, 억울하다는 듯이 테루시마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물론 개인 훈련도 할 거라고??? 니들 내가 맨날 농땡이만 피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나는 평소에도 훈련하고 있어!! 그치?? 대왕님!!”

대왕님이라고 제발 그만하세요! , 그래도 선배 말이 맞아요. 평소에도 근육 트레이닝 같은 거 하고 있고.”

알고 있거든? 그리고 근육 트레이닝뿐이겠냐. 배구공 갖고 뭔가 하다가 어제 사감선생님이 출동한 거 우리가 모를 줄 알았냐.”

너희들 은근 유명하다고?”

잠깐만요, 너희들이에요?? 왜 저도 엮이는 거죠?? 저는 아무 잘못도 안했는데요???”

같은 방이잖아.” 


후타마타의 대답에 오이카와는 입을 닫았다. 확실히 같은 방이라는 이유로 테루시마와 함께 사감에게 끌려가는 일이 많았다. 공을 몸의 일부처럼 착각하게 할 만큼 공을 많이 만져라. 옛날 인터넷 서핑을 할 때 보았던 글귀대로 쉬는 시간에도 공을 만지고 있으면, 테루시마는 그걸로는 부족하다며 살짝 공을 던졌다 받았다 하면서 그 나름대로 공을 손에 익히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 행동에 대해서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 공이 천장에 부딪치거나 벽에 부딪치거나 바닥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면 말이다. 덕분에 옆방과 윗방에서 클레임이 들어왔고, 어제는 사감 선생님까지 출동해 배구공을 압수해갔다. 하지만 그것에 굴복하지 않은 테루시마와 오이카와는 체육관에 있는 배구공을 빌려가려다가 아나바라에게 엄청나게 혼났다. 결국 방 안에서는 절대 배구공을 만지지 말 것, 이라는 각서를 쓰고서야 두 사람은 자유가 될 수 있었다.


오이카와. 진지하게 말할게. 너 이러다가 제 2의 유우지가 되버린다. 그럼 네 인생은 끝장이야.”

야 이 속에 시커먼 게 가득 차 있는 놈아!!! 나는 바이러스가 아냐!!! 너 계속 그렇게 예쁘게 말 하다간 언젠간 찔린다!!!!”

내가 너도 아니고 그런 실수를 저지르겠냐.”

저 재앙의 주둥이가!!!”


후타마타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테루시마가 바로 반박에 나섰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어디까지나 후타마타의 비웃음이었고, 열이 머리에 오른 테루시마는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잘못하다간 큰 싸움으로 번질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다른 2학년들은 오랜만에 한 판 붙는구나. 라는 안쓰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가 하면, 누가 이길까, 라고 내기를 하는 선배들도 있었다.


-정말 이 배구 부 괜찮은 걸까.


히나타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할 줄 모른다는 표정을 지은 채 성대하게 말싸움을 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괜찮아. 쟤네들은 저렇게 우정을 쌓아 가는 거니까. 그냥 너희들은 우리처럼 먼발치에서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면 된다고 생각해!”

……………따뜻한 눈.”

아니, 선배들 아무리 봐도 따뜻한 눈은 아니니까요???”

신경 쓰면 지는 거란다. 히나 짱. 오이카와.”


얼른 갈아입으라는 듯이 보바타가 두 사람의 등을 탁하고 치고 가버렸다. 이 배구 부, 정말 괜찮을까. 걱정이 들었지만 생각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생각한 오이카와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얼핏 평등해보이기는 하지만 이 조센지 배구부에도 엄연히 까이는 존재와 까는 존재는 존재한다. 후배이기도 하고, 놀리기 좋아서일까. 오이카와는 물론이고 히나타도 장난으로 툭툭 이것저것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 많이 놀림당하는 것은 테루시마였다. 이이자카가 아니면 후타마타와 자주 이렇게 투닥투닥거리는 걸 흔치 않게 볼 수 있었다.


, 일정 선을 지켜주고 있는 걸 보면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이게 조센지 배구부의 특유의 분위기인 걸까. 어떻게 보면 세이죠와도 닮아있었지만 전혀 틀리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여기서 자신이 있던 세이죠의 배구부의 모습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마다 자괴감이 든다. 여기는 조센지 배구부다. 세이죠가 아니다. 그렇게 자신에게 되뇌이며 단추를 잠그고 있으면, 어느새 교복으로 갈아입은 히나타가 오이카와의 옆에 쪼르르 달려왔다.


대왕님 대왕님. 골든 위크때 어떻게 하실거에요? 어디 머물 곳 있어요?”

“? 아니. 기숙사에 있을 건데.” 


히나타의 질문에 위화감을 느꼈지만,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오이카와가 딱 잘라 말했다. 집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물론 이 세계의 오이카와의 흔적이 보기 실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이와 짱을 보기가 힘들어.’


될 수 있다면 만나고 싶다. 하지만 저쪽에서는 오이카와를 만나는 것을 꺼려하고 있었다.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이것저것 짤막한 정보로 추측해보면, ‘오이카와 토오루가 배구를 관둔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듣고 싶기는 하지만……….’


저쪽이 이쪽을 보기 싫어하니 기회가 없다. 게다가 오이카와 토오루는 교우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는지, 친구가 없었다. 얼마나 슬픈 인생이야. 아니, 내가 이렇게 막 살았나. 분명히 자신이 아닌데 창피해서 죽을 것만 같다. 유일하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엄마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녀도 자세한 상황은 모른다고 했다. 그에게 직접 묻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기에 확 이와이즈미를 잡아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 일이 있던 후 오이카와도 이와이즈미를 만나는 것이 꺼려졌다. 그래서일까. 집으로 돌아가면 그를 만날 것 같았기에 그다지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 . 오이카와. 공지 안 봤냐.”

공지요?”

골든 위크 기간에 기숙사 보수공사 하니까 다 나가야한다고 올라왔잖아.”

……?”


이이자카의 정보에 오이카와는 순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골든 위크 기간에 기숙사에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점점 멍청해져가는 표정을 짓고 있는 오이카와가 우스웠는지 히가시야마와 보바타가 키득거리며 오이카와의 볼을 번갈아가며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초를 있었을까. 급히 휴대폰을 꺼낸 오이카와는 기숙사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농담이어라. 농담이어라. 농담이어야 해. 스크롤을 내리는 손가락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오이카와는 애써 무시하며 페이지가 뜨는 것을 기다렸다. 로딩시간이 1시간처럼 느껴진다. 로딩 바가 파란색으로 변하고 페이지가 열리자, 옆에서 모든 상황을 보고 있었던 누마지리가 화면을 가리켰다.


여기 있네. 기숙사 보수공사에 대하여.”

……세상은 잔혹해.”


그의 말대로 공지에 기숙사 보수공사, 라는 제목을 본 오이카와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이게 무슨 일이람. 아니, 애초에 집에서부터 이 곳까지 통학하기에는 너무 멀다. 세상이 끝난 표정으로 크게 한숨을 쉬면, 선배들도 분위기를 읽었는지 싸움을 중단하고, 더 이상 놀리지 않고 오이카와를 토닥여주었다.


…………우리, 골든 위크 때 합숙 안하나요?”

안 해.”

왜요!! 왜 학교는 허락 안 해주는 건데!!!”


한 가지 희망을 품고 조심조심 물어보았지만 주위에서 돌아오는 반응은 싸늘 그 자체였다. 물론 골든 위크 시기가 오자 히나타가 아나바라에게 합숙은 안하냐고 물었을 때 그에게서 학교에서 허락 안 해주니까 3일은 체육관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고 4일은 쉰다.’라는 대답을 확실히 들었다. 방금 전의 질문은 그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사람의 발버둥이었다.


예전에 다른 부의 OB가 합숙할 때 사고 친 이후로는 학교에서 합숙 허락 안 해준대

학교오오오!!! OB-!!!!!!!!!!!"


왜 학교는 다른 부가 사고를 쳤으면 그 부만 합숙을 정지시킬 것을 왜 다른 부까지 피해를 주는 걸까. 오이카와의 절규에 동의하는 듯이 히나타도 고개를 심하게 끄떡였다. 하지만 여기서 주장해봤자 바뀌는 것은 없는데다, 오이카와에게는 더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큰일이다. 일주일 동안 지낼 곳이 없어.’


저쪽에서라면 하나마키와 마츠카와의 집에 굴러 들어가면 될 텐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친구가 없다. 친구 한명정도는 만들어 놔라. 망할 토오루 놈아. 이쪽의 자신을 욕해보아도 사태는 변하지 않는다. 그냥 기숙사에 몰래 숨어있을까. 극단적인 생각을 하며 오이카와는 얼빠진 표정으로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고선 탈의실 밖으로 나갔다.


*   *   *


5월에 가까워져서일까. 날이 저물어도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까. 정말 돌아가는 수 밖에 없을까. 감독에게 사정을 말한다면 조금의 지각은 봐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집에서 있을 시간이었다. 4일 동안 그냥 방에만 쳐 박힌채 커튼도 닫고 있으면 이와이즈미와의 접점은 없지 않을까. 최대한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이와이즈미와 만나지 않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으면, 뒤에서 대왕님, 이라고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비 짱.”

대왕님. 집에 돌아가기 싫어요?”

하하하. 치비 짱은 정말 망설임 없이 이것저것 묻는 구나. -그래. 가기 싫어.”


상대가 히나타여서일까. 오이카와의 입에서 긍정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상대방이 대응하는 방식이 싫어서였다. 물론 변명을 하라고 하면 변명은 할 수 있다. ‘저 예전에 머리를 다쳐서 기억상실증에 걸렸거든요. 그런데 어머니의 눈빛도 불편하고, 그 방에는 옛날에 흔적이 잔뜩 있어서 돌아가기가 꺼려져요.’ 라고 웃으며 거짓말을 하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이 대답이 오이카와는 두려웠다.


-어차피 지금뿐이잖아. 기억을 되찾으면 또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텐데.


……아니야.


-뭐가 아니야. 아닐 거란 보장이 어디 있어. 나는 이미 너에게 실망했는데.


인간의 기억이란 흙탕물 같은 것이다. 평소엔 물 밑에 가라앉아있으면서도, 살짝 자극만 줘도 그 물은 흙탕물이 올라와 더러워지건 한다. 그것처럼 살짝 흔들기 만해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까지 떠올라버린다.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수면위로 올라오자 오이카와는 이를 꽉 악물었다. 만나고 싶지 않다. 만나서 해명을 하고 싶다. 만나서는 안 된다. 상반되는 바람이 파도처럼 밀려와 오이카와의 목을 조여 왔다. 숨이 턱 막히는 감각. 오랜만에 찾아온 감각에 오이카와는 무심코 목을 잡았다.


대왕님?” “!!!!”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감각은 히나타가 오이카와의 옷깃을 잡자 언제 있었냐는 듯이 훅하고 사라져버렸다. 놀란 표정으로 히나타와 그가 잡은 옷깃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는 오이카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히나타는 무언가 생각에 잠기더니,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오이카와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 시선이 너무나도 강렬했던 탓일까. 오이카와는 당황하며 무심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히나타는 굴하지 않고 오이카와가 물러난 만큼 한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대왕님!!!”

, 으응. 왜 그래? 치비 짱?”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걸까. 3자의 시선으로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지만 역시 현재 오이카와가 처해있는 상황은 이상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히나타는 자신의 옷깃을 잡고 긴장한 얼굴로 무언가를 말하려 하고 있고, 그 모습을 본 오이카와의 뇌리에는 누마지리의 니들 고백은 언제 하냐-?’라는 헛소리가 떠오르고 있었다. 왜 이게 지금 떠오르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오이카와는 손에 식은땀이 흥건해지는 감각을 받았다.

설마. 아니겠지. 고백일리 없잖아. 왜 나는 고백일거라 생각하는 거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일까.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히나타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딱딱하게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 오이카와의 망상에 더욱 더 박차를 가해주었기 때문일까.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자신은 여자가 좋은데다, 히나타와는 좋은 관계이자 동료만으로 남고 싶다. 라는, 미래의 자신이 들으면 어처구니 없을만한 문장이 떠돌고 있었다.


. 거절하자.’


그렇게 결심한 오이카와는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죄악감이 슬슬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자신은 히나타에게 연애감정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치비짱. 나는 그 마음-”

저희 집에 오실래요??!!!”


오이카와가 거절의 말을 입에 전부 담기 전에 히나타가 먼저 소리쳤다. 그리고 그 내용이 자신이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머릿속으로 인식한 순간 오이카와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뭐라고 했어? 치비 짱?”

, 그러니까! 골든위크 동안 우리 집에 오시라고요!!”


다시 한 번 히나타에게 방금 전 했던 말을 요구하자, 히나타는 빽하고 소리 지르면서도 친절하게 방

금 했던 말을 한 번 더 이야기해주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제대로 인식한 오이카와는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혀까지 굳어버린 모양인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 그 말을 왜, 긴장, 하면서.”

그야 상대가 대왕님이니까요! 게다가 저 선배에게는 이런 말 하는 거 처음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긴장 됐다고요!”

……….”


. 히나타의 말을 정리해보면, 그가 이 말을 꺼낼 때 눈에 띄게 긴장한 것은 어디까지나 오이카와가 선배여서였지,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창피해!!!!!!!!!!!!’


창피하다. 엄청 창피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바닥에 주저앉으면, 머리 위에서 히나타가 왜 그러냐고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오이카와는 거기에 대답해줄 기력이 없었다. 창피하고 창피해서 지금 당장 쥐구멍을 찾아 거기에 들어가고 싶었다. 분명히 기숙사에서도 자다가 생각나서 이불을 빵빵 차겠지. 이게 다 누마지리와 츠치유 때문이다. 그들이 계속 이상한 말을 해서 자기도 모르게 그럴지도 모른다고 세뇌되어버린 것이 틀림없다. 10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과거의 자신을 패 죽이고 싶다. 츠치유와 누마지리에게 나중에 커다란 보복을 해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오이카와는 창피와 수치심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얼굴의 열이 가라앉지 않는다. 히나타에게 미안, 잠시만이라며 양해를 구하며 대답을 미루고 있으면, 히나타도 오이카와처럼 쭈그려 앉아 오이카와가 진정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대왕님. 저희 집 올 거에요?”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참는데 한계가 온데다 이제 괜찮다고 판단했는지 히나타가 묻자, 오이카와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가락을 22로 나누고선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히나타를 흘깃 바라보았다.


…………갈래.”


물론, 그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Posted by 카멜리스
2017. 1. 23. 01:05

“-라고, 큰소리를 친 것은 좋은데. 무슨 대책이라도 있어? 치비 짱?”


방과 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공원에서 두 사람은 오이카와 선생님의 1:1 리시브 강습교실을 펼치고 있었다. 확실히 히나타의 리시브 실력은 늘어있었다. 하지만 그건 오이카와가 마지막에 보았을 때보다 조금 늘어있었다는 것이지, 지금 히나타가 그렇게 잘한다, 라고 하기에는 아직 그의 실력이 부족해보였다. 분명히 이쪽으로 올 때 스테이더스가 전부 초기화된 탓이다. 분명히 할 수 있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그의 어설픈 플레이는 그것 때문이겠지. 그리고 오이카와도 상황은 똑같았다. 서브도, 리시브도, 토스도 자신이 머릿속에서 그린 것과 다른 형태로 이루어진다. 확 사촌동생이 다니는 배구클럽이나 히나타와 함께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물론 창피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오이카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백의 2년을 채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세계에도 우시와카 짱이 있으니까.’


어떻게 잊겠는가. 잊을 수 없다. 오이카와를 절망의 바다로 빠트린 그 장본인을. 본인은 그런 자각이 없었다는 것이 오이카와에게 있어서 엄청난 절망이었다. 아마도 정말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모든 기억을 잊는다 해도 그 절망은, 그 증오는 아마도 잊혀 지지 않을 것이라고, 오이카와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 시간 선에 왔을 때, 원래 시간선의 미련을 떨쳐버릴 수 있었던 것은 이 곳이라면 그를 꺾어버릴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라는 것이었다. 헛된 희망이라고 비웃음 당해도 상관없다. 생각지 못했던 기회가 온 것이다.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회가.


그런데 이 상황이지.’


, 하고 배구공이 오이카와의 팔등을 맞고 히나타를 향해 튀어 올렸다. 그 공을 언제든지 받을 태세를 하며 히나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면, 그 공을 어떻게든 오이카와에게 올리며 히나타가 입을 열었다.


, 으으음……. , 어어어어……. , 모르겠어요.”

모르겠다니. 치비 짱. 맡겨달라고 하지 않았어?” 


오이카와의 지적에 히나타가 찔린다는 듯 한 모션을 취했다. 분명히 아무 대책 없이 말한 것이겠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히나타를 바라보면, 그것이 자신을 책망하는 눈빛이라고 생각했는지 히나타가 새파래진 얼굴로 굳어버렸다. 그래서일까. 그대로 오이카와가 리시브한 공을 아무 모션도 하지 못한 채 안면리시브 해버리고 말았다.


, 치비 짱??!! 괜찮아??”

, 괜찮…….”


급히 히나타에게 달려가 상태를 확인 해보면, 다행히 코피는 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사실에 내심 안도하면서도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고 있으면, 오이카와의 시야에 배구공이 누군가의 발치로 굴러가는 것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그거 저희 공이에요!”


굴러온 공을 주워 올렸기 때문일까, 오이카와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지나갔다. 가끔 남의 공을 말도 하지 않고, 본인이 보는 앞에서 자기 것이라는 듯이 가져가는 미친놈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오이카와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배구공은 보통 540엔정도의 가격부터 비싼 건 5천엔정도 하는 물품이다. 두 사람이 연습에 이용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비싼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도난당해도 괜찮을 물건은 아니었다. 살짝 얼굴을 굳힌 채 남자를 노려보고 있으면, 남자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가볍게 서브했다.

배구하고 있는 사람이다.

오이카와가 그렇게 인식을 하기도 전에 공은 히나타에게로 향했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공을 보고 히나타는 무심코 리시브로 공을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그리곤 우연일까. 그 공은 오이카와의 두 손 위에 푹, 하고 떨어졌다.


오오오! 대왕님! 나이스 캐치!”

………아니, 이건 어느 의미로 치비 짱이 대단한 거 아냐...?”


어디까지나 우연에 지나지 않은 기행이었지만, 히나타는 눈을 빛내며 오이카와를 응시했다. 그 눈빛이 부담스럽다는 듯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 아이는 순수하다. 그리고 멋진 것에 반응한다. 그야말로 꼬맹이다. 그예전에는 키가 작아서 치비 짱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자신의 사촌동생과 비슷한 수준이었기에 계속 치비 짱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게 치비 짱……….’


코트 안에서는 짐승. 코트밖에서는 꼬맹이. 프라이베이트와 그렇지 않을 때의 갭이 너무 커서 눈이 빙글빙글 돌아갈 정도다. 그렇기 때문일까. 오이카와는 가끔 히나타를 직시하기 힘들 때도 많았다. 물론,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오오, 정말 대단한데 오이카와!! 어떻게 한 거야? 그거!”


하지만 어린애는 히나타 뿐만이 아니라는 듯이 방금 전 서브를 넣었던 누군가가 눈을 빛내며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박력은 히나타보다 더 셌기 때문일까. 그가 한발자국 다가설 때마다 오이카와는 무심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노란머리의 투 블록에 잔뜩 피어싱을 한 학생이었다. 나는 불량입니다, 라고 선언하듯이 셔츠도, 넥타이도, 바지도 단전하지 않았다. 불량이다. 뒤에서 히나타가 중얼거리는 것과 그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를 지켜줘야겠다, 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런 자신이 박정한 걸까.


아니, 아마도 그럴 필요가 없는 거겠지.’


오이카와는 이 남자를 알고 있다. 물론 저 쪽에서 안면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 와서 알게 된 인물이다. 여기는 어쩐일이세요. 그렇게 물으려는 순간, 갑자기 히나타가 생각났다는 듯이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아-!! 카리아게 씨!!!”


!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상한 별명 붙이지 마!!!!!!!!!!!!!! ………? , 나 알고 있냐?”


남자의 지적에 히나타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오이카와의 표정이 새파래졌다. 히나타의 반응으로 보아하니, 그는 히나타가 저 쪽에서 알던 사람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지금이 첫 대면이나 마찬가지다. 배구를 하는 것 같으니 시합하는 걸 봤어요.’ 라고 처음에는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어떤 시합을 봤는데?’라고 되물으면 할말이 없고, 더 일만 꼬이게 된다. 이 사단을 만든 것은 히나타이고,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방관자의 자세를 취하려고 했지만 히나타가 제대로 수습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으면, 납득했다는 얼굴로 그가 입을 열었다.


아아. 니들이었냐! 점심시간에 미사키 선배 찾아간 녀석들!”

“???”

미사키 선배에게 우리 이야기 들은거 라면 납득이 가지. . 먼저 그걸 말하지 그랬어!!”

, 아파!! 아파!!!”


자신의 등을 때리는 그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노려보는 오이카와였지만 속으로는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미사키가 이미 이야기를 해준 것인지, 그때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히나타가 큰 소리를 내는 장면을 우연히 본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던 다행이었다. 뭐어, 그렇죠. 라고 대강 얼버무리는 두 사람의 모습이 재밌었는지 상대방이 킬킬하고 웃었다.

-무튼! 너희들. 미사키 선배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돌아가지 않을 거니까.”

테루시마 유우지. 그는 오이카와와 같은 방을 쓰고 있는 룸메이트였다. 쾌활한 성격으로, 오이카와를 처음 보았을 때도 이것저것 챙겨주곤 했지만 배구의 이야기가 나온 이후는 어째서인지 선을 긋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이유가 이거였나.’


배구 부를 싫어하고 있는 테루시마에게 있어서 배구부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는 오이카와는 고깝게 보였을 것이 틀림없다. 배구부는 그다지 좋지 않아, 라고 조언을 해줬는데도 배구부로 가고 싶다고 했으니 말이다. 어제의 테루시마의 상태를 그제서야 납득하고 있으면, 테루시마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입을 열었다.


-. 두 사람 다 나를 안다면 자기소개는 필요 없지? 잘 부탁한다는 말도 필요 없고 말야. 오이카와는 어쩔 수 없다 치고, 꼬맹이는 더 이상 나를 볼일도 없을 테고 말야.”


테루시마는 두 사람이 앞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 그걸 알면서도 만날 일이 별로 없다라고 선언한 것은, ‘나는 배구부에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다라는 의사를 처음부터 못박아둔 거나 다름없었다.


“-이유를 물어도?”


하지만 저쪽은 이쪽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온 것이다, 라고 오이카와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너희들이 하는 짓은 쓸데없는 짓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겠지. 하지만 히나타는 물론이고 오이카와도 물러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선배에게 못 들었어? 설명 3학년들이 이미 졸업했다고 해도 그 감독 밑에서 배구하는 건 이제 싫거든. 생각만 해도 불쾌하고, 진절머리 나고, 불쾌해.” 


잔뜩 불쾌한 얼굴의 테루시마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야기를 듣는것만해도 기분나쁜데, 그 기분나쁜 일을 직접 당한 사람은 어떨까. 그 분노를 이해못하는 것은 아니다. 싫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눈앞의 선배를 설득해야하는 의무를 갖고 있었다.


그 문제라면 괜찮아요.”

?”

감독님, 바뀌었대요.”

……………………?”


처음 듣는다는 듯이 테루시마가 얼빠진 표정과 대답을 내비쳤다. 미사키의 반응과 테루시마의 반응이 똑같다. 그렇다는 것은 다른 선배들도 작년 배구 부 선생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모른다고 보면 좋겠지. 아예 배구부에 관한 소식을, 선생님에 대한 소식을 차단하며 지내온 것일까, 아니면 정보가 전혀 전달되지 않은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한 오이카와는 곧 어느 쪽이던 상관없다, 라며 생각을 중단했다.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새 선생님은 아나바라 선생-”

--!!! 됐어! 그래도 안 돌아가! 안돌아간다고!”

? 어째서요? 3학년들도 없고, 감독님도 바뀌었는데?”


오이카와를 대변하듯이 히나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사키를 바라보았던 그 눈이 이번에는 테루시마를 향하고 있다. 히나타 특유의 꿰뚫어볼 것 같은 시선에 예외없이 테루시마도 살짝 어깨를 움찔했지만, 곧 평소의 페이스로 돌아와 히나타의 시선을 받아치며 입을 열었다.


“-나는, 질실강건이 싫으니까.”


그 말과 함께 테루시마는 배구공을 던졌다 받았다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꾸밈없이 착실하고, 심신이 건강한 플레이. 재미없잖아. 재미보다는 착실함을 추구하는 배구. 그건 나의, 우리들의 취향에 맞지 않아. 그러니까.”

당연히 그건 카리아게 씨에겐 맞지 않죠!!!!”


테루시마의 말이 끝나기 전에 히나타가 불쑥 끼어들자 오이카와와 테루시마가 동시에 어깨를 움찔했다. 이 타이밍에 끼어들 것이라고 두 명 다 예상하지 못한 것이겠지. 하지만 히나타의 말이 짜증났기 때문일까. 테루시마는 자기도 모르기 빼액하고 히나타에게 반론했다.


, 누가 카리아게야! 이건 투 블럭이라 하는 거라고! 그만 그렇게 불러!!! 제대로 자기소개도 했잖아! 제대로 이름을 부르라고!!”


필사적으로 테루시마가 태클를 걸어보았지만 히나타는 전혀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그치만 카리아게 씨는 자유로운 사람이잖아요. 물론 시합도, 연습도 나아지려면 착실히 해야 하지만, 그 착실함은 어디까지나 더 재미있고, 그 누구보다 즐겁게, 오랫동안 놀이터에서 놀 수 있도록만드는 초반이라고 생각해요. 질실강건 따위, 카리아게 씨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다고요.”

………….”

카리아게 씨. 배구, 좋아해요?”

………………별로.”


하지만 히나타도 오이카와도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까 전 부터 던졌다 받았다하는 배구공이 그 증거다. 배구를 오래 쉰 것 치고는 그 포즈가 너무 깔끔하다. 배구 부를 쉬었어도 배구연습은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가 말한 한마디. 그는 배구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학교의 배구 부를 싫어하는 것이다. 방금 전 우연히 자신의 손에 떨어진 배구공을 보고 눈을 빛내는 그의 모습을 보면 백에 백은 전부 이 사람은 배구를 좋아하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히나타도, 테루시마도 그 점은 입에 담지 않았다.


배구. 재밌어요.”

…………알아.”

그러니까, 같이 놀아요! 카리아게 선배!”


-그때처럼

히나타가 삼긴 뒷말이 오이카와의 귀에는 확실히 들렸다. 개인적으로 오이카와는 지금 히나타가 하고 있는 짓은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세계는 자신들이 있던 세계가 아니고, 눈앞에 있는 남자도 히나타가 원래 알고 있었던 테루시마 유우지도 아니다. 그러니 지금 히나타가 하고 있는 행동은 어디까지나 눈앞의 테루시마 유우지에게 자기가 알고 있던 테루시마 유우지의 상을 떠넘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눈 앞의 선배는 어쩌면 히나타가 말하는 저 말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자신의 등을 떠밀어줬으면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이와이즈미에 의해 깨닫게 된 것처럼, 누군가가 자신에게 납득할 수 있는 말을 해주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배구는 즐겁다라는 감각을 되찾아줬으면 하는 것을 바라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오이카와는 히나타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배.”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자신이 나설 차례다. 그렇게 판단한 오이카와는 테루시마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는 세터에요.”

……………….”

저는 6명이서 강한 팀을 만들고 싶어요. 강한 팀이 되도록 연주하는 것이, 강한 팀을 이끌며 승리의 음색을 연주하는 것. 그게 제가 목표로 하는 세터에요.”


카게야마는 세터를 코트의 지배자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오이카와는 코트의 6명이 힘을 합쳐 좋은 연주를 하게 만드는 것이 세터의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카게야마와는 더욱 더 맞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절대로 지지 않는 토스를 올리겠다고 단언은 할 수 없어요.” 


아직 자신이 없다. 기술도 체력도 그때보다 엄청 떨어지고, 만족할 만큼의 플레이를 할 수 없다. 머리에 몸이 따라갈 수 없는 감각. 몇 번이나 절망을 맛봤다는 것도 있었지만, 원래부터 토스 실력은 카게야마보다 딸린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에 자신만만하게 나의 토스는 최고, 라는 인식을 갖지 못한다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승패를 떠나, 절대 지루하게 만들지 않을 토스를 올리겠다고 약속드릴께요.”


그것 하나만은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같이 놀아요! 카리아게 씨!”


벙쩌있는 테루시마를 향해 히나타가 마지막 승부를 걸어왔다. 이쪽의 생각과 각오는 다 전했다남은 것은 그의 반응 뿐이다.


물론 싫다고 해도 달라붙을 거지만.’


오이카와는 은근히 끈질긴 편이다. 한번 거절당했다 해도 아 그렇군요. 라고 물러서는 헛 똑똑이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건 히나타도 마찬가지겠지. 안타깝지만 당신의 후배들 중 말을 잘 듣는 헛똑똑이는 없어요. 선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오이카와가 깊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테루시마를 바라보면, 테루시마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곧 발 아래로 떨어트린 채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그가 항복하겠다는 듯이 두 손을 들고 항복 제스처를 취했다.


……생각할 시간 정돈 줄 수 있겠지?”


그것은 현재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반격이자, 방어였다.

 


* * *


요즘 후배가 쫒아 다녀서 괴로워.”

닥쳐, 나는 같은 방이야. 툭하면 선배, 선배, 라고 말을 걸어서 너무 괴롭단 말야.”

말로만 들으면 그냥 인기 좋은 선배네. 잘 됐잖아?”

이왕 스토킹 당할 거면 내 취향의 여자아이가 좋았어…….”

지금 스토킹 하는 애들 이쁜 편이잖아? 한명은 미소년에, 한명은 목소리도 얼굴도 귀여운 편이고. 복 받았다고 생각하자고. 그냥.”

아니, 나는 뭘 당하던 여자애가 좋다니까.”

나도.”

이하동감.”


식당의 한 구석에서 하아, 하고 7인분의 무거운 한숨이 내뱉어졌다.

그들의 고민은 현재 단 하나. 최근에 자신들을 스토킹하는 2명의 후배들 때문이었다. 3일전 갑자기 배구부에 돌아와주세요, 하고 나타난 그들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자고 자신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히나타는 배구를 하자며 배구공을 들고 돌진해오고, 오이카와는 이 기술 어때요, 쩔지 않아요? 라며 아이패드로 0튜브의 배구영상을 보여주며 설득을 하고 있었다.

특히 오이카와와 같은 방인 테루시마는 죽을 맛이었다.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채 실신하고 있는 것 같은 친우에게 츠치유가 동정의 눈길을 보내고 있으면, 후타마타가 자괴감이 든다는 듯이 팔을 세워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깍지를 낀 손에 이마를 가져다댄 채로 낮은 목소리로 고해했다.


, 너무 쫄랑쫄랑 다가와서 나도 모르게 그 치비짱에게 토스 올려 줘버렸어…….”

나는 짜증나서 실수로 던져버렸는데, ……그 녀석, 너무 안정적으로 착지 해버린 거 있지? 그 후로 재미 붙어서 틈만 나면 무심코 던지고 있다.”

위험하잖아! 그거!”


보바타의 츳코미에 후타마타와 이이자카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로부터 3일정도가 지났다. 후배들이 배구 부를 부활시키자고 했을 때 그들은 싫다, 라고 하거나 생각만 해보겠다며 거절 의사를 표현했으나, 두 후배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달라붙어왔다. 그 모습을 떠올린 이이자카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 정신차려보면 휩쓸려 있었어.”

나도.”

실은 나도…….”


테루시마를 제외한 여섯 명이 다시 한 번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계속해서 한숨을 내쉬고 있었기 때문일까. 주위의 공기가 무겁다. 하지만 그걸 환기 시킬 마음도 들지 않는지 테루시마는 포크를 입에 문 채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빠진 표정이네.”


목소리가 들린곳을 바라보면, 그곳에는 오무라이스가 올려져있는 식판을 든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미사키가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선배의 모습에 다들 자리에 일어나 인사를 하려 했지만 미사키는 됐다며 고개를 저었다.


니들은 이미 배구 부를 탈퇴했으니까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해.”

그래도 미사키 선배는 특별하니까요.”


그녀는 악몽 같은 배구 부 시절 때 유일하게 그들을 신경써주고 챙겨줬던 사람이다. 어느 의미로는 은인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미사키를 잘 따랐고, 배구 부를 탈퇴한 지금도 미사키에게 만큼은 예의를 갖춰 대하고 있었다. 한칸씩 옆으로 가 자신의 자리를 만드는 후배들을 보고 미사카는 조금 부담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들의 호의를 받아 그들이 만들어준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왜 고민하고 있어? 뭐가 문제야?”


다짜고짜 본론에 들어가자 후배들은 단도직입적이네요, 라고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가, 곧 그녀의 시선을 피하듯히 입을 닫고 시선을 피했다. 그녀에게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마지막 추한 발악은 해보겠다는 의지다. 오무라이스의 반을 다 먹을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미사키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맞춰볼까? 이제 와서 배구부에 복귀하는 게 무서운 거지?”


아무도 반론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에 틀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녀의 말대로 그들은 복귀하는 게 무서웠다. 그래서 계속 도망치고 있었다. 그것도 확실히 자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 말없이 눈앞에 놓여있는 점심만을 바라보고 있으면, 미사키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저 애들은 분명히 빠른 시일 내에 놀이터의 토대를 만들 거야.”


그녀가 말하는 놀이터의 토대가 무엇인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것이 배구 부를 뜻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 자리의 누구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학년들에게 전부 맡기는 것은 엄청 꼴사납다고 생각하지 않아?”

………….”

너희들. 다시 배구부에 가고 싶잖아. 가서 인터하이에 나가서 우승차지하고 싶잖아.”

그건, 예전에 생각한.”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정말?” 


보바타의 반론에 미사키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딱 잘라버리고선 묵직한 한방을 날렸다. 그 말에 무언가 반론하고 싶은 자도 있는가 하면, 그저 입을 다문 채 시선만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자도 있었다.

그녀의 지적대로다. 배구부에 다시 가고 싶다. 인터하이에 나가고 싶다. 거기서 우승도 하고 싶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코트에서 뛰어놀고 싶었다. 하지만 배구부에는 그 감독이 있는 한 무리다. 그렇게 생각하며 포기해왔는데, 갑자기 그 감독은 이미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음 같아선 바로 배구부로 돌아오고 싶었지만, 돌아가면 안 될 것 같은 죄악감이 들었다.


-너는, 도망쳤잖아.


그렇다. 그 감정은 죄악감이다. 자신들은 도망쳤다. 부조리에서, 증오심에서, 고통에서 도망쳤다. 그 결과가 배구부의 폐부다. 그러니 이제 와서 그 곳으로 돌아가기에는 죄악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계속 고집만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대로 가면 정말 1학년들이 세운 토대에 숟가락만 올리는 꼴사나운 선배가 될 거야. 너희들.”

미사키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추측으로만 맞추는 선배가 두렵다고 생각하며 테루시마는 조심조심 미사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미사키는 더 이상 그들과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는 듯이 어느새 다 먹은 접시와 쟁반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 상담을 원하면 해주겠지만 내가 먼저 조언을 해주는 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해. 나머지는 너희들이 잘 생각해보도록 해.”


그 한마디만을 남기고 그녀는 자리를 나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거대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해보았자 결심이 서지 않는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계기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런 부류다. 약한 사람이다. 다시 한 번 테루시마가 거대한 한숨을 내쉬고 있으면, 이이자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나가자고.”


자리에 앉아서 한숨만을 푹푹 내쉬면서 고민해봤자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 그 말에 다들 동의했는지 식판과 쟁반을 들고 미적미적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판을 정리하고 식당 밖으로 나가 음료수를 사먹을 때까지도, 그들은 여전히 한숨만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 왜 여기로 왔어.”


어느샌가 시야에 들어온 체육관을 보며 테루시마가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팀 메이트들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교실로 돌아가기에는 기분도 꿀꿀하고, 무언으로 산책을 하자고 결정한 그들은 한동안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으면, 어느 샌가 체육관으로 와버렸다.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테루시마가 항의를 하면, 다른 사람들은 나는 모릅니다, 라는 태도를 취하며 툴툴거렸다.


몰라. 나는 유우지군을 따라간 것뿐인걸-”

나도나도

이것들이 나한테 책임전가 하네.”


친구가 아니라 웬수들이다. 얼굴을 찌푸린 채 나쁜 놈들. 맨날 이렇지. 등등 그들의 양심을 자극할 것만 같은 말을 전부 내뱉어 보았지만 그 누구도 듣고있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이 피도 눈물도 없는 것들. 나중에 두고보자. 이를 부득부득갈며 그들을 노려보았지만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들리지도 않습니다. 라는 태도를 취할뿐이었다.


“....돌아가자.”


열만 내봤자 피곤해지는 것은 자신이다. 게다가 앞으로 15분 정도만 있으면 점심시간도 끝나는데다 체육관에는 볼일따위 없다. 테루시마의 말에 이견이 없다는 듯 다들 고개를 끄떡이며 테루시마를 따라 발길을 돌렸다.


“-대왕님!”


그런 두 사람의 발목을 잡은 것은 익숙한 목소리와, 공이 어딘가에 부딪쳐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공이 무엇에 부딪쳐 튀어오르는 것인지, 그 자리의 2학년들은 한순간 이해해버렸다. 여태까지 그들이 눈을 돌리고 있던 것이었으니까.


………….”


먼저 그쪽으로 발걸음을 돌린 것은 후타마타쪽이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살짝 비틀거리고는 있지만, 한 순간 그의 표정을 보았던 히가시야마는 그가 정신을 놓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스쳐지나가는 후타마타의 얼굴은 살짝 긴장하고 있었으니까. 마치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마주하려는 사람의 표정 같았다고, 히가시야마는 생각했다.

인간은 할까 말까 고민하는 순간, 누군가가 먼저 행동을 일으키면 자신도 그것에 따라 행동을 하는 케이스가 있는데, 아마도 지금 자신들은 그런 상황이 아닐까 하고 츠치유는 생각했다. 그 증거로 후타마타가 움직이자 다른 사람들도 따라 그와 같이 소리의 근원지를 확인하러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면 우리는 이걸 기다리고 있었던 걸지도.’


아마도 지금부터 볼 것은 자신의 등 뒤를 떠밀어줄 계기가 될 것이다. 라고, 츠치야는 그런 근거 없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체육관 뒤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치비 짱!!!”


그리고 그들의 바람대로, 그들의 계기가 될 만한 광경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곳에는 네트도, 기본 설비도 아무것도 없었다. 네트 대신 쓸 생각이었는지 바닥에는 두꺼운 선이 두 개 그어져 있었을 뿐. 그리고 그 다음에 눈에 들어온 것은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히나타의 모습이었다. 땅을 박차고 점프하는 것뿐이었지만, 키에 비해서 높게 뛰어올랐기 때문일까. 그들의 눈에는 히나타가 날아오르는 것으로 보였다.

오이카와의 손에서 떨어진 공이 히나타에게 향했다. 그 공을 똑바로 보던 히나타는 망설임 없이 선 바깥쪽으로 내리찍었다.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지 알 수 없을 정도의 한 순간의 일이었다. 공이 내리찍어지면서 생긴 자국과, 저 멀리 굴러가는 배구공을 보던 두 사람은 잠시 멍 때리더니, 곧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유는 아마도 방금 전 한 속공인 것이라 그들은 추측하고 있었다. 그동안 하지 못한걸 드디어 해낸 사람처럼 서로 얼싸안고 방방 뛰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2학년들은 사전에 이야기라고 한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떡이더니,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도망가려는 것은 아니었다. 도망간다, 라는 선택지 따위는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저런 재미있는 걸 하는 녀석들을 두고 도망갈 리가 있겠냐!’


지금 저 녀석들과 배구를 하지 않으면 오래오래 후회할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그들은 주머니 속에 아무렇게나 구기고선 방치했던 입부 신청서라고 프린터 되어 있는 종이쪼가리를 들고 교무실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 한숨을 푹 쉬던 분위기는 거짓말 같이 사라지고, 그들의 눈동자 안에는 살짝 빛이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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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바꿨습니다. 

Posted by 카멜리스